"전쟁에 대한 경계가 동아시아 지식 유통 촉발했다"

입력 2017-03-07 08:00
"전쟁에 대한 경계가 동아시아 지식 유통 촉발했다"

김시덕 교수 '전쟁의 문헌학'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실에는 일제강점기에 기증받은 '신간 동국통감'(新刊東國通鑑)이라는 일본 책의 목판이 있다.

신간동국통감은 조선시대 문신인 서거정 등이 1485년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정리해 펴낸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바탕으로 일본인 유학자 하야시 가호(林아<我 아래 鳥>峰, 1618∼1680)가 1667년 편찬한 책이다.

우리나라 역사서인 동국통감이 일본으로 흘러간 계기는 전쟁이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때 왜군이 동국통감의 목판을 가져갔고, 일본인들은 이를 저본 삼아 자신들만의 한국사 교과서를 만들었다.

지난해 '일본의 대외 전쟁'을 출간한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신간 '전쟁의 문헌학'(열린책들 펴냄)에서 15∼20세기 동아시아, 특히 일본에서 전쟁을 통해 지식이 어떻게 유통됐는지 추적한다.

전쟁에 관련된 문헌을 연구해온 저자는 이번 책에서 "상대국의 문헌과 정보가 수집되고 담론이 형성된 주된 원동력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우호적 감정이 아닌 전쟁에 대한 경계와 준비였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견해는 전쟁이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어왔다는 이언 모리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전쟁의 순기능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유통 과정에서 전쟁이 차지한 역할에 주목한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은 에도시대(1603∼1867)에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에서는 징비록뿐만 아니라 수많은 임진왜란 관련 문헌이 생산됐다. 그중에는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통속 군담(軍談)인 '임진왜란 연의(演義)'도 있었다. 임진왜란 연의는 중국 소설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의 일본판이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본인이 한 축을 이루는 삼국지연의를 만들고 읽고 싶어하는 욕망이 에도시대 일본인들을 자극해 임진왜란을 다룬 연의를 탄생시켰다"고 분석한다.

조선도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병법에 관한 학문인 병학(兵學) 서적을 비롯해 다양한 책을 입수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많은 일본 도서가 유통됐다.

예컨대 조선 후기 학자인 한치윤(1765∼1814)은 한국사 서적 '해동역사'(海東繹史)를 집필하면서 일본에서 1688년 출판된 역사서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과 1712년에 나온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를 인용했다.

또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는 당시 조선에서 열람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본 서적을 읽고 무예 교범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시화 품평집 '청비록'(淸脾錄) 등을 펴냈다.

하지만 상대국의 병학에 관한 관심은 조선보다는 일본이 훨씬 더 컸다. 저자는 우리가 '유학자'로 알고 있는 일본의 학자들이 병학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고, 이런 요소가 조선보다 빠른 근대화와 서구화를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17세기 말기 이후 조선 왕조를 지배한 비(非) 무사적 집단이, 무사 집단이 국가를 방어한다는 명분을 발휘하고 있던 대청제국과 도쿠가와(德川) 일본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군사학과 전쟁사가 비주류적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560쪽. 2만8천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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