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바둑처럼…정석 익히되 사랑할 땐 잊어버려라"
이승우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할 때 겪는 경험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는 생각으로, 에세이처럼 가볍게 써보려고 했습니다."
작가 이승우(58)는 5년 만에 낸 아홉 번째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예담)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작가가 그동안 주로 탐구해온 신과 인간, 원죄와 죄의식 같은 주제보다 훨씬 보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복잡다단함은 어느 종교적 질문에 뒤지지 않는다. 인과관계가 드러나기는커녕 무엇이 먼저인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는 상황이 시종 벌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이 빚는 사랑의 겉모습은 단순하고 평범하다. 형배는 2년 10개월 전 자신이 구애를 거절했던 선희를 어느 결혼식장에서 재회한다. 이번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선희에게 이끌린 형배가 사랑을 고백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출판사 편집자인 선희는 그사이 일로 알게 된 영석과 사귀는 중이었다. 형배는 한밤중 선희를 불러낸 자리에서 영석과도 마주친다. 질투와 의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영석에게 형배가 말한다. "선희가 당신을 많이 힘들어 한다고요. 왜 그 생각을 못 해요?"
작가는 뻔한 삼각관계에 빠진 인물들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탐구대상은 평소의 사고체계와 숨겨진 무의식이 그 감정을 만들어낸 과정이다. 사유의 결과는 입증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종종 '이유 없음' 이외에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그렇다. 형배는 결혼식장에서 앞자리에 앉은 어느 여자의 귓바퀴에서 하트 모양을 발견했다. 평소 귀에 대해 특별한 취향이 있지도 않았고 그 귀가 특별하게 생긴 것도 아니다. 예식의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 무심코 던진 시선이 사랑의 감정을 싹 틔웠고, 그 귓바퀴의 주인이 선희였다.
"이건 좀……제멋대로라는 생각 안 들어요?" 형배의 고백에 선희가 말한다. 복수심이 아닌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누군가에게 들었으면 황홀했을 테고 다른 누군가 했더라도 불쾌하지는 않았겠지만 상대가 형배였기 때문에 선희는 이물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 빛나는 단어가 합당하지 않게 사용됨으로써 빛을 잃고 돌멩이처럼 나뒹굴고 설렘이 아니라 언짢음과 부담을 제공하는 가시가 되어버린 사태를 몹시 마음 아파했다."
세 사람이 본격적으로 얽히게 된 이후 영석의 불안한 심리는 사랑과 연애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선희는 형배와 파스타를 먹으러 한밤중에 외출하면서도 '셀카'를 보내달라는 영석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민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영석은 열두 번을 전화한 끝에 선희를 찾아 무슨 일 생긴 줄 알았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아닐까'보다는 '그녀가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을 겪게 하는 게 아닐까', '혹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이 더 컸다.
세 인물이 사랑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설렘·초조함·분노·질투 등 갖은 감정과 싸우는 동안 '자유연애주의자' 준호는 사랑과 결혼, 연애와 쾌락이라는 큰 틀에서 통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준호는 사랑과 결혼이 다른 층위에 있고, 결혼은 사랑과 전혀 상관이 없거나 아주 조금만 상관있다고 주장한다. "연애는 왜 완성되기 위해서 연애의 밖으로 나가야 한단 말인가."
그런 준호의 생각을 바꾼 상대는 결혼을 사랑의 목적지가 아닌 시발점으로 여기는 민영이었다. 민영은 변덕스러운 감정처럼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결혼으로 보장받기 위해 키스도 거부한다. 준호는 설득당한 듯 "사랑을 하기 위해 결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형배에게는 "키스하기 위해 결혼한다"라는 말로 들린다.
사랑이 비논리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탓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일종의 면책을 받게 된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린 사람 속으로 들어와 목숨을 이어가다가 제멋대로 빠져나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이 시키는 대로 욕망하고 주문한다. 사람과 사랑은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와 같다.
사랑에 대한 명확하고 누구나 공감할 정의는 소설에 없다. 사랑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나 그런 걸 묻는다. 작가는 사랑을 바둑에 빗댔다. "바둑에서 정석을 배우되 둘 때는 잊어버리라는 격언이 있잖아요. 사랑도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292쪽. 1만3천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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