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초유의 계열사 자율경영…'3두 체제'로 갈까
'전자·생명·물산' 중심 헤쳐 모일 것 전망도…사령탑 부재 우려도 커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 삼성이 그룹의 사령탑 격인 미래전략실을 해체함에 따라 삼성은 그룹 체계를 갖춘 이후 처음으로 계열사별 독자경영의 길을 가게 됐다.
1959년 창업주 이병철 선대 회장이 '비서실'을 만든 이래 그룹 컨트롤타워가 해체된 적은 전에도 있었지만 막후 활동 등으로 명맥이 끊기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지금과는 다르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삼성으로서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셈이다.
삼성은 공식적으로 "미전실 해체에 따라 삼성의 각 계열사들은 앞으로 자율경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계열사의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가 독자적·자율적인 판단과 의사결정에 따라 경영을 해나간다는 얘기다.
이는 비공식적으로 의사결정에 관여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미전실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 경영과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그동안 미전실이 개별 회사의 경영에 크게 관여는 안 했으니까 앞으로 크게 달라질 부분은 없지만 상징적으로 투명성이 제고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는 어떤 결정에 대해서든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분이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지적했다.
이미 삼성 계열사들은 전문경영인 체제, 이사회 중심 경영이 착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당장 경영에 큰 차질이 빚어지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서는 미전실 해체 후 삼성그룹이 3대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생명·물산 중심의 '3두 체제'로 굴러갈 것이란 관측을 내놓는다.
이들 3개 사는 그룹의 핵심 계열사이면서 다른 계열사들의 지분을 많이 쥐고 있어 사실상의 지주회사 또는 중간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005930]와 디스플레이·전기·SDI·SDS 등 전자·전기·IT 분야 계열사 사장단끼리 모여 사업영역 구분 같은 조정자 기능을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또 금융계열사의 경우 삼성생명[032830]의 우산 아래에 삼성화재·증권·카드·자산운용 등이 들어와 계열사 간 협의와 조율을 한다는 것이다.
삼성물산 중심으로는 바이오·중공업 등 나머지 계열사가 뭉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삼성 관계자는 "앞으로는 계열사별로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사업을 영위하겠다는 것"이라며 "필요하다면 사안별로 관련성이 있는 계열사 사장끼리 협의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의 공식 입장은 3두 체제 역시 가동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연 매출 300조원, 임직원 50만명에 달하는 공룡 조직을 거중조정하는 컨트롤타워의 해체는 재계 일각에서 우려를 낳는다.
당장 계열사 간 업무·기능 조정이 마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의 경쟁력 중 하나로 꼽히는 신속한 시장 대응과 적응 능력은 사실 미전실의 순기능 중 하나였다고 봐도 된다"고 말했다.
빠른 판단과 실행력, 일사불란한 지휘체계 덕분에 삼성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자들보다 한발 빠른 대응에 나설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략적 인수·합병(M&A)에 대한 조율 기능, 계열사 간 임직원 전환배치, 계열사 간 업무 분장·조정, 강력한 감사·경영 진단 시스템 등도 미전실이 있어 가능했던 것들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상 경영을 맡게 된 후 활발히 추진해오던 그룹의 사업 재편에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
방위산업·화학 등 그룹의 비(非)핵심 전력을 매각하고 핵심 사업 위주로 '선택과 집중'을 한다는 구상이었지만 그룹 컨트롤타워 없이는 동력을 잃을 수 있다.
장기적인 관점의 미래 먹거리, 당장 수익은 낮아도 꼭 필요한 핵심역량에 대한 투자 등은 단기 실적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전문 경영인의 한계이기도 하다.
재계 관계자는 "미전실의 감사 기능도 계열사별로 들어가 잘 가동되겠지만 회사 바깥에서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던 부분은 약화할 것"이라며 "수십 년간 지속된 시스템이 사라지면 당분간 시행착오나 부작용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삼성 저격수'로 불리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도 미전실 해체에 대해 우려스럽다는 반응이다.
김 교수는 "미전실의 공과에 대한 논란이 많았지만 다수의 계열사로 이뤄진 대기업집단에서 컨트롤타워를 없앤다는 것은 형용모순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이는 사실상 그룹을 해체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를 어떻게 높이고, 기능·업무는 어떻게 조정할지에 대한 구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며 "이재용 부회장이 형사재판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 차원의 조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도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중요하지만 미전실 해체가 반드시 바람직한지는 모르겠다"며 "계열사 간 사업상 이슈를 조율하기 위한 컨트롤타워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중요한 것은 개별 회사 주주들의 이해에 반하는 방향으로 컨트롤타워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며 "없애버리는 게 답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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