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 '명사수' 박인환 의병장 부대 규모 최대 확인

입력 2017-02-27 11:58
항일운동 '명사수' 박인환 의병장 부대 규모 최대 확인

정재상 향토사학자 문건 공개…영호남 의병 400여명 지휘



(하동=연합뉴스) 지성호 기자 = 구한말 항일운동을 펼치며 명사수로 이름을 날린 박인환(1882∼1909, 박매지로도 불림) 의병장 부대 규모가 1909년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것으로 밝혀졌다.

경남 하동에 있는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은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일본군 헌병대 보고서 '폭도수령조서'(1909년 3월)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박인환 의병장의 부대 규모 등을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정 소장은 "지금까지 박 의병장 부대 규모가 30∼40명 안팎으로 알려졌으나 이번 문건에서 규모가 400여 명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박 의병장이 함북 경성 출신 윤승지 의병장과 함께 400명 이상을 지휘한 2명의 의병장 중 한 명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당시 나머지 의병부대는 대부분 20∼80명 전후 중·소규모 부대인 것으로 문건에서 확인했다.

정 소장은 "1908년 10월 박동의 경남창의대장이 산청에서 전사한 이후 박 의병장이 경남창의군 최고지도자로 활약한 사실도 이번 문건을 통해 입증됐다"고 덧붙였다.

이 문건에는 전국 지역별 의병장 이름·신분·출생지·부하 수·활동지역 등이 기록돼 있다.

1909년 3월 국내·외에서 활동한 의병장은 304명(국내 291명·국외 13명)이며 의병 수는 1만1천863명으로 적혀 있다고 그는 소개했다.

의병 200명 이상 지휘한 의병장은 총 10명으로 경기도 출신 3명, 황해도 2명, 평안도 2명, 경상도가 3명이다.

박 의병장은 15∼16세에 총알 한 방으로 호랑이 급소를 명중시켜 숨통을 끊는 등 명사수로 알려졌다.

그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1907년 8월 초 26세 때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힘을 길러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며 지리산 기슭 전남 구례에서 의병을 모았다.

박 의병장은 1909년 2월과 6월 함안 군내 일본인 집과 함안 칠원경찰서를 습격하고, 진주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일제와 격전을 벌이는 등 항일운동을 지휘했다.

1909년 7월 22일 진주시 대평면 신풍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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