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 도전과 희생의 아이콘 이승훈, 그는 누구인가
동계AG 한국 최초 4관왕…쇼트트랙에서 스피드로 전향해 밴쿠버올림픽 금메달
소치올림픽 실패 뒤 매스스타트 세계 최강으로 우뚝
(오비히로<일본 홋카이도현> =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 이승훈(대한항공)은 도전의 아이콘이다.
그는 스피드스케이팅으로 빙상계에 입문한 뒤 신목중학교 시절 쇼트트랙으로 전향했다.
한국 쇼트트랙의 벽은 높았다. 대표팀 선발전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출전한 국제 대회에서도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승훈은 2009년 4월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발전에서 고배를 마시자 과감하게 스피드스케이팅 스케이트를 신었다.
전향 과정도 드라마틱했다.
그는 스피드스케이팅 스케이트가 없어 다른 선수의 스케이트를 빌려 신고 훈련했다.
이승훈은 종목을 전향한 뒤 불과 6개월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특유의 체력과 끈기를 앞세워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사실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는 유럽 선수들의 전유물이었다. 체격 조건이 비교적 떨어지는 아시아 선수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승훈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대회를 준비했다.
그해 11월 남자 5,000m에서 한국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단숨에 밴쿠버 올림픽 메달 기대주로 발돋움했다.
그는 밴쿠버 올림픽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좋은 성적을 거뒀다.
남자 5,000m 은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10,0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
올림픽 우승을 차지한 뒤에도 이승훈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2011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역사상 4번째 3관왕에 오르며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아시안게임 이후 이승훈은 슬럼프를 겪었다.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해 직선 주로 훈련에 전념했는데, 한동안 국제 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하며 주춤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은 밴쿠버 올림픽 때처럼 최고의 컨디션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주변의 높은 기대도 부담이 됐다.
그는 5,000m에서 12위에 머무른 뒤 고개를 떨구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훈은 좋지 않은 컨디션에도 불구, 김철민, 주형준과 함께 출전한 팀 추월 경기에서 총 8바퀴 중 절반가량을 선두에 서며 팀을 이끌었다.
팀 추월에서 선두에 서는 선수는 맞바람을 견뎌야 해서 체력적인 부담이 상당하다.
그러나 이승훈은 "최대한 버티겠다"라며 리더 역할을 자임했고, 그 결과 한국 대표팀은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이승훈의 도전 정신은 매스스타트가 도입된 2014-2015시즌부터 더욱 빛을 발했다.
매스스타트는 출전 선수들이 지정된 레인 없이 400m 트랙을 16바퀴 돌아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가 우승하는 종목이다.
자기 레인이 없다 보니 선수들은 쇼트트랙처럼 상대 선수와 치열한 신경전은 물론 자리싸움까지 벌여야 한다.
이승훈은 생소한 신생 종목에 과감하게 출사표를 던졌다. 쇼트트랙 선수 출신인 이승훈은 본인의 특화된 기술을 끌어올린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승훈의 도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그는 올 시즌 이 종목 세계랭킹 1위에 오르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전망을 밝혔다.
그러나 '확실한 주 종목'을 찾은 뒤에도 이승훈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단체전인 남자 팀 추월과 장거리 종목을 포기하지 않고 팀 훈련에 매진했다.
그는 한국 나이로 서른 살이 된 올해에도 매스스타트와 장거리, 단체전에 모두 참가하며 강행군을 소화했다.
이승훈은 작년 12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유럽권 선수들도 서른 살 이후에도 최고의 기량을 펼친다"라며 "아직 내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나이를 거스르는 그의 도전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이승훈은 2월 초 강릉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오른쪽 정강이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고도 열흘 만에 2017 삿포로 아시안게임 출전을 강행해 금메달 4개를 휩쓸었다.
이승훈의 거침없는 행보는 계속된다. 그는 "모든 목표는 평창 올림픽에 맞춰졌다"라며 "긍정적인 자세로 평창 올림픽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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