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100일] 후진국형 가축 전염병, 한국의 '습관' 됐다

입력 2017-02-22 05:31
수정 2017-02-22 06:18
[AI 100일] 후진국형 가축 전염병, 한국의 '습관' 됐다

가금류 3천300만마리 몰살…경제적 피해규모만 1조원

사상 초유 '계란 대란' 이어 '닭고기 대란' 우려까지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사상 최악의 피해를 낸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에 이어 서로 다른 유형의 A형과 O형 구제역까지 최초로 동시 발생하면서 한국이 후진국형 가축전염병의 온상이 되고 있다..



처음에는 생소하던 AI와 구제역이 어느덧 연례행사처럼 국내에서 발생하고 있지만 당국의 안이한 대응과 농가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겹치면서 피해는 해가 갈수록 커지는 양상이다.

특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본격화하던 시기에 터진 AI는 당국이 발생 초기에 '방역의 골든타임'을 놓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피해가 커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AI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터진 구제역은 당국의 방역 체계가 얼마나 허술한 것이었나를 여실히 보여주면서 근본적 시스템 정비의 필요성을 일깨워줬다는 지적이다.



◇ 빠르고 독한 AI로 닭 농가 초토화…피해규모 1조원

지난해 11월 16일 전남 해남 농가에서 최초 의심 신고가 접수된 이후 지난 20일 현재까지 AI로 도살 처분된 가금류 수는 3천314만 마리에 달한다.



국내 전체 사육 가금류 1억6천525만 마리의 20%에 달하는 규모다.

특히 알 낳는 닭인 산란계의 피해규모가 컸다. 도살 처분된 전체 가금류의 71.3%에 해당하는 2천362만 마리가 산란계였다.

육계와 토종닭은 275만 마리가 살처분됐고, 오리는 247만 마리, 메추리 등은 430만 마리가 AI로 희생됐다.

올겨울 우리나라를 휩쓴 H5N6형 바이러스는 과거 유행한 그 어떤 AI 바이러스보다 전염성이 강하고, 확산 속도가 빠른 것이 특징이었다.

발생 50일 만에 전국 10개 시·도의 37개 시·군으로 확산했고, 3천 마리 넘게 살처분되면서 역대 최단 기간 내 최악의 피해를 기록했다.

1월 중순 이후로는 다소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2월에도 여전히 야생 조류에서 AI 바이러스가 검출되고 있어 종식 선언까지는 갈 길이 먼 상황이다.

국내 전체 사육 가금류의 5분의 1이 살처분되면서 이로 인한 경제적 피해규모만 1조원에 달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현대경제연구원은 AI 살처분 마릿수가 전체 사육 마릿수의 20%를 차지할 경우 초래되는 직·간접적 손실이 9천846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정부가 지금까지 추산한 살처분 보상금 소요액만 2천600억을 웃돈다.

여기에 농가 생계안정자금과 소득안정자금 등 직접적 비용과 육류·육가공업, 요식업 등 연관 산업에 미치는 간접적 기회손실 비용까지 모두 합치면 피해규모가 1조 원에 달한다는 분석이다.



◇ 사상 초유 '계란 대란'에 '닭고기 대란' 우려까지

사상 최악의 AI는 사상 초유의 '계란 대란'을 불러왔다.



전체 산란계의 30% 이상이 살처분되면서 계란 수급이 불안해지자 계란값이 폭등한 것이다.

AI 발생 전 30구들이 한판(특란 기준)에 5천원대 중반 수준이던 계란 평균 소매가는 산란계가 대거 살처분되면서 공급부족 현상이 심화하자 지난달 12일 한판에 9천543원까지 치솟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계란 한판에 1만원이 훌쩍 넘는 경우가 속출했고, 물량 부족에 따른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물량 부족과 가격 급등 등으로 시장이 혼탁해지자 일부 업자들이 가격이 더 오를 때까지 물건을 쟁여놓고 시중에 내놓지 않아 품귀 현상을 가중시키는 매점매석 논란을 빚기도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정부는 수급 불안 해소와 가격 안정 등을 위해 사상 처음으로 계란을 수입하기로 하고 항공료까지 지원해가며 신선란을 해외에서 긴급 공수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이 정책은 일각에서 '세금 낭비'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계란 성수기인 설 연휴를 앞두고 외국산 계란이 수입되면서 급등세를 거듭하던 계란값이 꺾이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설 연휴 이후 계란값은 하향 안정세로 돌아섰지만 이번에는 닭고깃값이 들썩이고 있다.

AI 확산세가 한창일 때 소비심리 위축 등으로 ㎏당 888원까지 급락했던 육계 시세는 설 연휴 이후 소비심리가 회복되면서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해 지난 14일 현재 ㎏당 2천200원으로 AI 발생 전보다 2배나 폭등했다.



다급해진 정부가 '치킨 대란'을 막기 위해 하림, 마니커, 체리브로 등 육계기업들이 비축하고 있던 냉동닭 7천t을 향후 2주간 시장에 풀도록 했으나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AI로 닭이 대거 살처분된 데다 이동제한조치로 병아리 입식이 지연되면서 닭고깃값이 계속 오르는 추세"라며 "정부의 긴급 대책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 엎친 데 덮친 구제역…방역체계 허점 고스란히 노출

AI 확산세가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하자 이번에는 구제역이 덮쳤다.

사상 최악의 피해를 낸 2010~2011년 '구제역 대란' 이후 적극적인 백신 정책을 도입한 당국은 소의 항체 형성률이 97.5%에 달한다며 예방을 자신했으나 이런 자신감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당국이 엉터리 통계 수치를 근거로 맹신하던 구제역 백신 접종이 사실은 허점투성이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구제역이 발생한 지역의 실제 항체 형성률이 5~19%밖에 되지 않는다는 충격적 사실이 밝혀지고 일선 농가에서 착유량 감소와 육질 저하 등을 우려해 일부러 백신을 놓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백신 접종을 농가 자율에 맡겨놓고 모니터링을 게을리한 정부의 무사안일과 당장 코앞의 이익이 감소할 것을 우려해 백신 접종을 게을리한 일부 농가의 모럴해저드가 맞물리며 구제역 방어 시스템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백신 논란도 가열됐다.

당국이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도입한 백신 정책이 끊이지 않는 효능 논란으로 흔들리고 있고 100% 해외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불안한 현실이 확인되면서 조속히 국산 백신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다행히 우려했던 A형 구제역이 경기 연천지역 젖소농가 외에는 발생하지 않고 있고 AI 초동대처 실패로 뭇매를 맞았던 방역 당국이 신속한 '외양간 고치기'에 나서면서 구제역은 크게 확산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번 AI와 구제역 사태를 거치며 방역 시스템의 허점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만큼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철저한 시스템 재정비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류영수 건국대 수의학과 교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다 바뀌어야 한다"며 "농민들은 방역과 접종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정부는 무엇보다 방역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호성 전북대 수의대 교수는 "선진국처럼 방역을 전담하는 독립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며 "방역 정책은 타협하거나 절충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passi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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