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부천 만화박물관 나들이 어때요"
추억과 꿈 깃든 세상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풍덩'
(부천=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만화가 드라마나 영화로 대박을 내는 시대지만 예나 지금이나 만화에 대한 부모의 인식은 변함이 없다. 한국 만화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경기도 부천의 한국만화박물관은 아이와 부모의 만화에 대한 시각차를 줄일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상설ㆍ기획전시관, 만화체험관, 만화영화상영관, 만화도서관 등을 차례로 둘러보면서 만화의 세계에 풍덩 빠져보자.
한국만화의 효시는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 화백의 ‘삽화’다. 이후 눈물과 웃음과 꿈으로 시대의 다양한 표정을 담아낸 한국 만화는 100년이 조금 넘은 지금, 영화 ·드라마·캐릭터 상품·게임 등과 결합해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2001년 10월 개관한 한국만화박물관의 누적 관객 수는 지난 2월 250만 명을 돌파했다. 1층에는 제2기획전시실, 만화영화상영관, 체험마당, 카페테리아가 있고 2층에는 만화도서관, 체험교육실, 창의 교육실이 있다. 3·4층에는 상설전시관, 제1기획전시실, 4D 상영관, 만화체험존, 카툰갤러리 등으로 구성됐다. 1·2층은 입장권이 없이도 들어갈 수 있지만 3·4층이 메인 전시공간으로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 따라서 동선은 메인 전시공간을 둘러본 뒤 2층과 1층 순으로 관람하면 된다.
◇“그림이든 내용이든 독창적인 걸 만들어내야 해”
1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간다. 왼쪽에 위치한 제1기획전시실을 먼저 둘러보고 난 뒤 맞은편 우리나라 만화 역사 100년을 되짚어보는 상설전시관으로 이동해야 한다. 제1기획전시실에서는 오는 4월 9일까지 만화계의 거목 중 한 명인 박기정(80) 화백의 60년 만화 인생을 담은 ‘박기정의 도전’이라는 전시회가 열리는데 눈여겨볼 만하다.
전시회는 극만화가로의 도전, 시사만화가로의 도전, 만화계 권익을 위한 도전, 창작-그 끝나지 않은 도전 등 4개 파트로 나눠 다양한 작품과 활동상을 보여준다. 1960년대 최고 베스트셀러였던 ‘도전자’, ‘폭탄아’의 작가, 박기정 화백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기증한 ‘은하수’ ‘불사조’ ‘별의 노래’ ‘레슬러’ ‘흑가면’ 등 단행본 표지 원화를 감상할 수 있다.
1960년대 창작한 ‘폭탄아’ 중 새로 그린 일부 장면의 원화와 아이디어 노트, 캐릭터 개발 스케치, 캐리커처도 볼 수 있다. 디지털 만화와는 또 다른 옛 만화의 필력을 느낄 수 있다. 직접 제작한 만화주인공 피규어도 눈에 띈다. 벽 한 면의 “그림이든 내용이든 독창적인 걸 만들어내야 해, 독창적인 걸. 그래야 승부할 수 있다고. 비슷한 그림은 아류밖에 안 돼”라는 박 화백의 말이 인상적이다.
그동안 ‘불량과자의 추억전’ ‘김종래전’ ‘한국-스페인 만화교류전’ ‘만화, 문화재가 되다!’ ‘축구, 열정 그리고 만화전’ ‘돌아온 독고탁전’ ‘광복70주년기념만화전-전쟁과 가족’ ‘소녀, 순정을 그리다’ ‘박기정전’ 등 다양한 기획전시가 열렸다.
◇ 손때 묻은 펜대에서 작가 숨결 느끼다
상설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기면 미술과 만화의 만남을 구현한 크로스 오버 디지털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미디어아트의 대표작가 이이남의 작품으로 사계절이 변화하는 산수화를 배경 삼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만화캐릭터인 이두호의 머털이, 신문수의 로봇찌빠, 박수동의 고인돌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표현했다.
이곳 벽을 따라 걸으면 ‘만화란 무엇인가?’라는 공간이 관람객을 맞는다. “만화는 우리 삶의 보약이다- 박기정” “만화는 간식이다- 김동화” 등 만화의 정의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이 타이포그래피 중심으로 꾸며진 영상이 흐른다. 오세영, 고우영 등 120여 명의 만화가가 사용한 펜도 볼 수 있는 데 오랜 세월 손때가 묻은 펜대를 통해 작가의 숨결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이후 우리 만화의 역사가 시대 흐름에 따라 전시된다. 동선을 따라가면서 만화 변천사와 국내외 작가들의 유명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근대만화의 시작과 일제 강점기 시대에서의 개화’ 코너에서는 안석주의 만문만화(漫文漫畵)가 눈길을 끈다.
만문만화란 흐트러진 글과 난삽한 그림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 경성의 일상을 다채로운 시각으로 담아냈다. 전차 안에서 황금시계와 보석 반지를 자랑하기 위해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 모던걸의 허영심은 21세기의 ‘된장녀’를 떠오르게 한다.
‘1945∼50년대, 새로운 시대 도약하는 만화’와 ‘1960년대, 만화의 인기폭발과 불리한 시스템의 정착’ 코너에서는 엄마를 찾아 전국을 떠도는 어린 소년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그린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 한국 최초의 에스에프(공상과학) 장르인 김산호의 ‘라이파이’, 시대상을 코믹하게 담아낸 방영진의 ‘약동이와 영팔이’ 등이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1967년 중소출판사들이 뭉쳐 ‘합동’이라는 이름으로 만화 출판과 유통을 독점하게 되었고, 정부의 사전심의제도는 한국 만화의 기반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동네 만화방, 아이들의 유일한 문화공간”
바로 이어지는 ‘땡이네 만화가게’는 향수를 자아낸다. 만화방 앞 전봇대에는 박기정의 ‘도전자’ 주인공인 훈이 기대서서 1960년대 만화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고, 만화방 안 서가에는 김산호의 ‘피너 3세와 라이파니’, 박기정의 ‘도전자’ 등 당시 만화책 복사본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당시 만화책을 볼 수 있어서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하는데, 훈이는 부모를 잃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받았던 차별과 핍박을 프로 복싱으로 날려버리는 캐릭터로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정책기획팀 이효재 주임은 “1958년까지만 해도 만화방이란 공간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고 만화책을 모아 등짐을 지고 다니며 공원이나 시장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돗자리를 펴고 만화책을 빌려주는 대여 좌판 운영자들이 있었다”며 “변변한 놀거리도, 공공 도서관도 드물었던 60∼70년대에는 동네 만홧가게가 아이들에게 유일한 문화공간이자 꿈의 장소였다”고 말한다.
‘1970년, 대중잡지의 흥행이 만든 만화의 다양성’과 ‘1980년대, 경제적 성장이 만든 만화계의 황금기’ 코너에서는 이상무의 ‘비둘기 합창’, 강철수의 ‘사랑의 낙서’, 고우영의 ‘임꺽정’,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 허영만의 ‘오 한강’,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등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원화 표지를 볼 수 있다.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만화 단행본 ‘토끼와 원숭이’(1947년 발간), 우리나라 최장 연재 시사만화(연재기간 1955∼2000) ‘고바우 영감’, 1958년 초판 발행 이후 10쇄가 출간된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엄마 찾아 삼만리’, 칸과 말풍선을 사용하는 현대 만화 형식을 처음 시도한 작품 ‘코주보 삼국지’등이 등록문화재로 등재된 사실에 대부분 관람객은 깜짝 놀란다.
이어지는 곳은 ‘1990년대. 대중문화의 콘텐츠로 자리 잡는 만화의‘황금기’코너로 ‘보물섬’‘소년 챔프’‘아이큐점프’ ‘팡팡’‘미르’‘댕기’‘영점프’‘윙크’ 등 이름만으로 반가운 만화잡지들이 원본 혹은 대형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자동차만큼 커다란 잡지 모형 바로 옆 4D 상영관에서는 ‘어린이들의 대통령’인 뽀로로와 친구들이 펼치는 모험을 4D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뽀로로 슈퍼썰매 대모험’이 상연된다. 1천원을 별도로 내야 한다.
◇ 만화가 체험존, 아이·어른 모두에 인기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통로 앞엔 명예의 나무가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만화가의 캐릭터를 나무액자에 새겨 큼지막한 나무 형상으로 만들었다.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작가의 연혁과 작품 세계를 검색할 수 있다.
4층으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요즘 대세인 웹툰 전시공간이다. 2011년 미스터리 단편 가운데 하나인 호랑의 ‘옥수역 귀신’을 비롯해 윤태호의 ‘미생’, 하일권의 목욕의 신’, 양영순의 ‘천일야화’,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 등 2000년대 이후 우리 만화의 큰 흐름으로 꼽히는 웹툰을 소개하고 있다. 2003년에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 시리즈로 시작한 웹툰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만화 코너 등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웹툰은 출판을 넘어 영상·광고·디자인 ·캐릭터 등 2차 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하는 등 그 새로운 가능성을 높여가고 있다. 웹툰 원작 영화로는 영화 ‘26년’‘순정만화’‘이끼’‘패션왕’ 등 다양한 작품이 있다. 출판만화와 구분되는 스크롤 기법으로 ‘옥수역 귀신’을 감상할 수 있다.
‘만화가 머릿속’ 코너는 책상에 엎드려 자는 거대 만화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으로, 다양한 크기의 볼록 거울과 요술 거울 등으로 만화가의 일상, 만화가의 즐거운 상상, 원고마감에 쫓기는 만화가의 고충을 재치 있게 풀어내고 있다.
만화가들의 작업 도구 중 하나인 라이트박스를 이용해 만화캐릭터를 그려볼 수 있는 ‘나도 만화가-만화그리기’ 체험존은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인기다. ‘아기공룡 둘리’나 ‘미생’의 장그래 등 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부터 웹툰 만화의 주인공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골라 그려보며 만화가의 작업 과정을 체험해볼 수 있다. 만화 속 크로마키 체험 코너에는 인기 웹툰과 만화 속 장면과 자신의 모습을 합성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이현세 작가의 까치 오혜성을 만날 수 있는 ‘공포의 외인구단 한판 승부’코너도 관람객으로 붐비는데 이곳에선“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오혜성의 대사가 귓전을 맴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만화 대중화를 이끈 최고의 흥행작이었다.
4층 관람을 마치면 2층의 국내 최대 만화 전문 자료실인 만화도서관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이 도서관은 국내외 만화와 만화 관련 학술자료, 논문 등 27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대여는 안 되고 열람만 가능하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곳곳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만화 삼매경에 빠져 있다. 지하 1층의 수장고에는 1950~60년대 대표적인 작가들의 육필원고 6만여 장과 희귀 만화 1만여 권이 보관돼 있다.
changho@yna.co.kr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3월호 [박물관 탐방]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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