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분 회견이 재앙?'…트럼프와 미 언론 적대적 공생

입력 2017-02-18 11:36
'77분 회견이 재앙?'…트럼프와 미 언론 적대적 공생

'트럼프 효과'로 케이블 TV들 시청률 고공행진

언론 때리기 즐기는 트럼프 '지지자 결속' 효과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김현재 특파원 = 트럼프의 16일 '돌발 기자회견'을 놓고 미국의 대부분 언론은 '격정의 77분은 미국의 재앙'이라고 비판했다.

새 노동부 장관 내정자를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기자실을 찾은 그는 20여 분간 자신의 입장을 발표한 뒤 50여분간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는데, 모든 잘못된 상황은 전임 오바마 행정부의 책임이며 자신은 취임한 후 짧은 시간(3주) 안에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많은 것을 이뤄냈다고 했다. '남 탓'과 '자화자찬'이 민망할 지경이었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나쁜(bad) 사람'이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은 '위대한 미국인'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 논리는 대통령 선거 유세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가 상당 부분의 시간을 자신에 대한 비판과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들, 그것도 CNN,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 유수 언론을 직접 거명하며 그들의 "뉴스는 가짜(fake)'라고 주장하는 데 할애했다는 점이다.

CNN 기자가 "우리 뉴스가 가짜 뉴스냐"고 하자, 그는 "말을 바꾸겠다. 정말 가짜(very fake)"라고 극단적인 증오를 표출했다.

또 "나에게 친화적인(friendly) 언론 없느냐"며 질문자를 일방적으로 선택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모하고 자기도취적인 미국 대통령은 없었다면서 CNN은 '역사상 놀라운 순간'이라고 긴급 뉴스로 온종일 방영했다.

트럼프와 언론 간의 갈등, 아니 전쟁은 아마 임기 내내 계속될 것이다.

베테랑 TV 뉴스 전문가인 조너선 클라인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정당성을 지닌 언론 탐사보도의 가장 적합한 목표물"이라면서 "그는 규칙위반자, 또는 게임 체인저라는 위치를 설정하고 있고 '진정한 언론인'이라면 이를 취재하는 일에 입맛을 다시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프랭크 세스토 조지 워싱턴대 언론학과장도 "트럼프 같은 독특한 인물이 아무런 행정 경험이나 이념적 지도 없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전례 없는 일 자체가 뉴스 매체들에는 '목적의 시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송사들이 목적성과 취재의 정당성만으로 트럼프와 전쟁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폭스 뉴스, CNN, MSNBC, CNBC 등의 시청률은 고공 행진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케이블 TV들이 트럼프가 시청자들에게 어필하는 힘을 의식해 그에 대해 유화적 보도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 트럼프건, 반 트럼프건 그와 관련된 뉴스는 시청자를 TV에 붙잡아 놓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 현상은 대선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케이블 방송들은 '트럼프 취임 100일'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는데 할애한다.

지난 1월 폭스 뉴스 시청률은 전년 1월에 비해 26%가 올랐고, CNN 역시 15%가 상승했으며, MSNBC는 무려 36%나 뛰어올랐다고 LA 타임스는 전했다.

케이블 방송들은 대선 때보다 오히려 정치 패널을 더 보강하거나, 트럼프의 공격을 받은 인물을 앵커로 기용하면서 시청률 견인에 나서기도 한다.



트럼프에 친화적인 폭스 뉴스는 트럼프에 비판적이었던 메긴 켈리 대신 보수논객인 터커 칼슨을 밤 9시 앵커로 기용했고, MSNBC는 트럼프의 직접적 공격을 받은 케이티 터 기자를 낮 황금시간대 뉴스 앵커로 내걸었다.

LA 타임스는 "세계가 곧 끝나지 않을 것이며, 핵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며, 소요사태가 전국을 휩쓸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대중이 인식하고 안심하는 순간 케이블 TV의 시청률은 떨어질지 모른다"며 "그러나 트럼프 취임 후 얼마간은 시청자들이 TV 앞을 떠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와 언론의 적대적 공존은 언론에만 유리한 것이 아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기자회견은 트럼프 취임 후 최대의 개가였다"면서 "그는 77분 동안 업적을 떠들고 기자들을 조롱하고 자신이 지상 최대의 쇼의 무대감독처럼 행동했다"고 말했다.

WP는 "그에게는 좋은 뉴스냐, 나쁜 뉴스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면서 "그는 이 모든 것을 즐기고 있다"고도 했다.

신문은 "당초 그가 새 노동부 장관 후보자를 소개하러 나왔기 때문에 질문을 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기자들이 예상했지만, 잠시 뒤 그들 모두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그는 자신 이외의 다른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회견이 끝난 후 모든 세상 사람들이 '트럼프'만을 얘기했다는 점이라고 WP는 지적했다.

그의 언론 때리기가 전략적인 것인지, 단지 그의 성향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분명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지지자들을 더욱 강하게 결속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kn020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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