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겪고 나니 문학이 구원 아닌 지옥으로"
"여성적 감수성 제거 자기검열도"…'문단 내 성폭력' 토론회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한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가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나의 생명이자 구원, 빛이었는데 성폭력을 겪고 나니 지옥이 되더라.' 가해자는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다가 자신의 가해가 드러나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보복성 고소를 한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단체 '셰도우핀즈'의 한 활동가는 17일 오후 서울 서교동 카페창비에서 '#문단_내_성폭력, 문학과 여성들'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해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들의 모순을 꼬집었다. 문학을 위해 현실에서 벗어나라고 말하다가 자신의 가해 사실이 폭로되면 형사사법절차라는 가장 세속적인 수단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문인들의 성폭력을 트위터에 폭로한 피해자 상당수가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당한 상태다.
이 활동가는 "이제 피해자들의 말하기가 시작됐는데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성이 잡히지 않은 것 같다"며 "피해자들은 폭로 이후 돌아갈 자리가 있는지 고민한다. 발화 이후 그들의 자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논픽션 작가 은유는 문단 내 성폭력이 공론화한 이후 문단의 미지근한 대응을 비판했다. 작가는 "세월호 사건 때처럼 문인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날 줄 알았다. 세월호를 통해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인식했듯 문단 성폭력에도 같은 강도의 충격을 받아 일사불란한 대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조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독자로서 시라는 장르를 성역화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작가는 "시는 약자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담아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믿음이 컸다. 시를 무성적으로 생각했는데 사건 이후 시인의 성별을 보게 됐다"고 전했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중심의 관음적 시선이 보편화한 문학작품 속 성차별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성에 대해 얘기하는 게 쿨하고 상상력의 절정인 것처럼 생각돼 왔다. 창녀 아니면 성녀, 달아오르게 만드는 여자 아니면 엄마 같은 여자. 이런 전형에서 벗어나는 여성상을 제시하지 못했다."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졸업생 모임 '탈선' 대표인 오빛나리씨의 말이다.
여성 문인들은 그동안 작품활동을 하면서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을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됐다고 고백했다. 시인 유계영은 "그동안 문학작품을 읽을 때 탐미주의에 중점을 뒀고 여성이 배제되고 있다는 생각을 진솔하게 해본 적이 없었다. 시를 쓸 때도 여성적이라고 치부될 만한 감수성을 사전에 제거하는 자기검열을 했다. 한 발로만 뛰고 있는 답답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소설가 이수진은 "등단 이후 8년 동안 대부분 소설의 화자를 남성이나 무성을 썼다"면서 문단 내 성폭력 사건으로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나는 여성을 화자로 글을 쓰지 못한다고 믿었다. 이것도 일종의 여성혐오"라며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운동에 빚을 졌다. 세계를 뒤집고 내 몸을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는 지난달 출범한 출판사 창비의 문학플랫폼 '문학3'이 주최했다.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공론화한 이후 처음 열린 공개토론 자리다. 소설가 황정은·조해진·박민정, 시인 김현·안희연·안미옥 등 현역 문인들과 독자 100여 명이 참석했다.
dad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