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천 칼럼]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도래
(서울=연합뉴스) 세상이 다 알다시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부동산 재벌 출신이다. 뉴욕의 도심 개발과 애틀랜타의 카지노 사업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작년 9월 영국 BBC는 포브스를 인용, 트럼프 재산을 37억 달러로 추정했다. 트럼프가 선거 당국에 신고한 재산은 100억 달러가 넘는다. 하지만 그를 미국 대통령으로 만든 잠재력은 돈이 아니다. 굳이 일등 공신을 꼽으라면 '트럼프'라는 브랜드 파워일 것 같다. '어프렌티스'라는 인기 TV프로그램을 10년 넘게 진행하면서 얻은 유명세 말이다. '어프렌티스'는 미국 NBC방송이 2004년 방영하기 시작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트럼프는 2015년 대선에 뛰어들면서 그만둘 때까지 무려 11개 시즌의 사회를 맡았다. 시즌마다 100만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을 뚫고 뽑힌 최종 우승자는 트럼프 소유 계열사와 연봉 25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다. 여성으로 치면 신데렐라 신드롬의 재현인 셈이다. 트럼프는 매회 방송에서 탈락하는 출연자에게 "자네 해고야!(You're fired)"라고 소리쳤다. 큰 제스처와 함께 떨어지는 이 해고 선언은 고급 브랜드 '트럼프'를 상징하는 유행어가 됐다.
이런 방송 경험 때문인지 대선 기간 내내 트럼프는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공직 경험이 전무한 정치 신인이었지만 복잡한 정책 이슈에 부딪쳐도 막힘이 전혀 없었다. 특히 온갖 통계수치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기억력(?)은, 흠 잡을 데 없는 스펙을 자랑하는 클린턴 후보를 능가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트럼프의 화려한 언변은 얼마 못 가 초라한 밑천을 드러냈다. 언론의 팩트체킹은 그의 사기극을 그냥 두지 않았다. 트럼프의 거짓말을 가장 아프게 폭로한 사이트는 미국의 폴리티팩트(politifact.com)다. 정치인들의 공약과 발언의 진위를 확인해 점수를 매기는 팩트체킹 사이트인데 2009년 퓰리처상을 받을 만큼 권위도 있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대선 직전이던 작년 11월 현재 트럼프가 발언한 말 중 70%는 거짓말이었다. 이 사이트는 매년 '올해의 거짓말상'을 주는데 2015년 수상자가 바로 트럼프다. 결국 후보 토론회나 유세장에서 그가 술술 풀어놓은 말들은 대부분 '생각나는대로 떠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치부가 언론에 의해 반복적으로 폭로됐는데도, 그 똑똑하다는 클린턴을 꺾고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희비극의 줄거리를 설명할 수 있는 용어가 있다. 바로 '포스트 트루스(post-truth)'다. '탈(脫)진실' 정도의 우리 말로 옮겨지는 이 합성어는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의미한다. 유독 지난해에 많은 관심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 사전의 '올해의 단어'로 선정됐다.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가 국민투표에서 통과되고, 뻔뻔히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트럼프가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으로 뽑히는 상황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포스트 트루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스티브 테쉬흐라는 미국 극작가라고 한다. 레이건 행정부의 이란콘트라 스캔들을 풍자한 1992년의 한 에세이였다. 그런데 24년 후인 지난해 7월 위키피디아에 '포스트 트루스 정치'라는 독립 항목이 처음 생겼다. 브렉시트와 미 대선을 거치면서 옥스퍼드 사전의 이 단어 검색 횟수도 20배로 늘었다. 바야흐로 세계는 본격적인 '탈진실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미국은 원래 말이 가벼운 나라가 아니다. 거짓말 한마디 했다고 재선 대통령을 일거에 날려버린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워터게이트'의 늪에서 '난 모르는 일'이라고 계속 발뺌을 하다가 '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쫓겨난 닉슨 얘기다. 정치지도자의 거짓과 허위에 그토록 엄격했던 미국이 불과 40여 년 만에 진실과 가장 거리가 먼 듯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한 가지만 꼽으라면 인터넷 등 뉴미디어의 확산이 아닐까 싶다.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면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시킬 수 있다. 그렇게 정보가 넘쳐나도 흑백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내 맘에 드는 것만 믿고 따르는 확증편향적 정보 소비가 대세로 떠오른 이유다. 특히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급속한 보급은 그런 정보 흐름의 왜곡을 부추겼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확증편향적 정보 소비는 결국 진실을 밀어내고 '가짜 뉴스(fake news)'에 눈을 돌린다. '탈진실' 시대는 그렇게 우리 곁으로 왔다.
탈진실 시대는 곧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의 전성시대이다. 심각한 얼굴로 진실에 호소하는 민주주의는 탈진실 시대에 설 땅이 없다. 영국의 브렉시트, 트럼프의 당선, 유럽의 극우세력 발호 등이 모두 그 방증이다. '벚꽃 대선'이 유력한 한국도 탈진실의 시대적 조류에서 자유롭지 않다. 대통령 탄핵의 혼란 속에 조기 대선 국면이 달아오르면서 어김없이 포퓰리즘의 망령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척 봐도 지키기 어려운 공약(空約)들이 난무하고,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엉거주춤 줄타기하는 정치인들이 줄을 선다. 더욱이 우리 국민은 원래 정치인들의 말 바꾸기에 관대하지 않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오래 전부터 탈진실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가롭게 사유할 여유는 없다. 당장 이번 대선에서 '탈진실'의 퇴행적 조류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관건이다. 다시 트럼프로 돌아가 반면교사를 찾자면 우선 '편가르기'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득표만 겨냥해 국민 사이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후보한테는 절대로 표를 주지 말아야 한다. 트럼프 취임 이후 미국이 겪고 있는 혼란상이 그 이유를 웅변한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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