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질 않아요"…김은숙·박지은도 사로잡은 '기억상실'

입력 2017-02-05 10:30
수정 2017-02-05 16:09
"기억나질 않아요"…김은숙·박지은도 사로잡은 '기억상실'

이야기의 확장·반전을 위한 장치…기억상실도 진화 중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기억이 나질 않아!"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머리를 쥐어뜯고 뭐라도 기억의 단초가 될만한 것을 찾기 위해 발을 동동 굴러보지만 별반 소용이 없다.

기억상실이라는 소재는 온갖 드라마에서 그간 숱하게 써먹었지만, 최근에는 그 활용법이 업그레이드됐다는 게 특징이다. 앞뒤 맥락 없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서사와 나름의 개연을 안고 등판한다.

덕분에 '막장'이라는 비난은 피하고, 드라마의 극적 긴장감을 높여준다.



◇ 비행기 사고로, 탈북하다가, 희귀병으로…

과거 드라마에는 기억상실이 주로 교통사고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막장' 드라마에서 엉성한 스토리를 복잡하게 꼬기 위한 '얕은수'로 등장했다.

요즘에는 양상이 좀 달라졌다.

MBC TV '미씽나인'은 비행사 추락사고로 무인도에서 표류하다가 4개월만에 사회로 복귀한 라봉희(백진희 분)가 지난 4개월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SBS TV '피고인'은 열혈 검사 박정우(지성)가 딱 하룻밤의 일만을 갑자기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기억이 삭제된 그날 밤 자신의 아내와 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

MBC TV '불어라 미풍아'에서는 미풍이의 아버지 김대훈(한갑수)이 탈북 과정에서 총격으로 아들을 잃은 뒤 기억을 잃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세 작품 모두 인물들이 극심한 트라우마로 인해 기억상실이 발생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판타지도 가세했다. tvN '도깨비'에서는 도깨비와 저승사자가, SBS TV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는 인어가 사람의 기억을 자유자재로 지워버렸다.

'도깨비'는 김은숙 작가, '푸른 바다의 전설'은 박지은 작가가 쓴 작품이다. 현재 최고 몸값을 받는 인기 작가 둘이 우연히도 같은 시기, 같은 판타지 장르에서 기억상실을 주요 소재로 활용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희귀병도 있다. KBS 2TV '오 마이 금비'는 아동성 치매 니만피크 병을 소재로 10살 소녀 금비(허정은)의 기억이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을 조명했다.



◇ 기억은 생물학적 증상, 드라마가 예술적·관념적으로 활용

정신과 전문의 최병하 여주 세민병원 과장은 5일 "기억은 지극히 생물학적 증상으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생물학적 뇌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라며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관념적, 예술적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억상실은 크게 기질성 기억상실과 심인성 기억상실로 나뉜다. 전자는 뇌경색, 뇌종양, 전기충격, 멀미약 등 약물, 알콜 등을 통해 뇌가 손상될 경우 발생한다. 후자는 수치심이나 죄책감, 배신, 생명의 위협 등 극심한 스트레스의 결과로 나타난다.

전자의 경우는 뇌를 손상한 원인이 제거되면, 후자의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기억이 돌아온다. 술 먹고 필름이 끊겼다가 술이 깨면 기억이 돌아오고, 트라우마가 극복되면 기억이 돌아오는 식이다.

그런데 심인성 기억상실의 경우는 진단과 감별이 어렵다. 꾀병, 허위장애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거짓 기억상실'인데, 드라마에서 써먹기 딱 좋은 대목이다.



'도깨비'나 '푸른 바다의 전설'의 경우는 전생의 기억도 다루고, 최면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내용도 그렸다.

최 과장은 "기억은 경험을 뇌에 저장해두었다가 다시 불러내는 것인데, 최면은 기억을 불러오기보다는 무의식적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심리적 해결책을 찾아보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생을 기억해내는 등의 주술적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망각은 신의 배려'라는 '도깨비'의 대사에 대해서는 "문학적 표현이지만 인간에게 망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며 "사람이 모든 일을 다 기억하고 산다면 그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나쁘고 힘든 일은 어느 정도 잊혀야 하고 그래서 잠을 자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이야기의 확장·반전을 위한 장치…기억상실도 진화 중

김영섭 SBS 드라마 본부장은 "기억은 이야기를 확장하는 장치이자, 뻔한 이야기 구도를 뒤집는 반전의 장치로 활용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에는 기억상실을 아주 단순하고 뻔하게 써먹었다면, 요즘은 의학적으로 접근해 개연성 있게 활용하고 있다"며 "기억상실이라는 소재의 변종들이 등장하면서 나름대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불가측성을 담보로 하기에 극성을 강화하는 장치로서 제격"이라고 덧붙였다.

최병하 과장도 "요즘은 기억상실이라는 소재가 과거보다 좀더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등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커지는 현실이 기억상실 소재에 대한 공감대를 높인다고 분석했다.

최 과장은 "예측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현대인은 전반적으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며 "드라마 속에서 기억을 잃은 인물을 보면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심리가 생긴다. 그런 점에서 기억상실은 극적으로 매력적인 요소"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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