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충 10%, 천적 90% 잡는 밭두렁 소각…멀쩡한 산만 태운다(종합)

입력 2017-02-04 12:12
해충 10%, 천적 90% 잡는 밭두렁 소각…멀쩡한 산만 태운다(종합)

두렁 서식 생물 중 해충 10%뿐…소각 득보다 실, '산불 주범' 전락

산불 원인 30%가 두렁 소각…농촌 쓰레기 수거 개선, 소각 규제해야

(전국종합=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이월(음력)에는 두 번째 땅갈이를 하는데 습기가 있으면 해가 되고 이로움이 없다. 지난해 곡식을 해친 벌레가 밭두둑과 논두렁 사이에 붙어살다가 또 해를 끼칠 것이다. 땅갈이 때 밭두둑과 논두렁을 불태워야 한다"



농가설(農家說)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 말고도 '농가월령', '위빈명농기' 같은 옛 농서에는 논·밭 두렁 소각에 관한 얘기가 많이 등장한다.

옛날에는 본격적인 영농철이 시작되기 전에 두렁의 잡초를 태우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해충 방제나 황무지 개간, 재거름 제조를 위한 중요한 농사 기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직도 논·밭 두렁을 태우는 관습이 이어지고 있지만 위상은 180도 달라졌다.

농사에 별 효과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을 뿐 아니라 산불의 주범으로 지탄받는다. 그런데도 농촌 노인들은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으레 두렁을 소각한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두렁을 태우다 불길이 번져 큰 산불이 되곤 하지만 오래 유지되어온 관습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농촌진흥청과 산림청 등 관련 당국은 두렁 태우기가 득보다 실이 훨씬 크다고 강조한다.

논·밭두렁에 서식하는 생물 가운데 해충은 11% 정도밖에 안 되는 반면, 해충의 천적이 89%에 달해 두렁을 태우면 천적이 훨씬 더 많이 죽는다는 것이다.

두렁 소각이 도열병, 흰잎마름병, 애멸구, 벼물바구미 등 병해충 방제에 효과는 거의 없고, 오히려 천적인 거미, 톡톡이 등 이로운 벌레 피해가 커서 농사에 좋지 않다는 얘기다.

농촌진흥청은 "두렁을 태운 뒤 75일 정도가 지나면 식생과 동물상이 소각 이전 상태를 완전히 회복하는데 천적류 복원 속도가 해충보다 늦어 방제에는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고 설명한다.

산림청 산불통계연보를 보면 2006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전체 산불 건수의 18%는 논·밭두렁 소각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입산자에 의한 실화(40%)에 이어 두 번째 원인이다.

쓰레기 소각(12%)까지 합치면 산불 10건 중 3건은 산 인근 지역의 소각행위 때문에 발생한 셈이다.

한때 주춤하는 듯했던 논·밭두렁 소각에 따른 산불 건수는 2012년 18건, 2013년 77건, 2014년 98건, 2015년 99건으로 증가세가 확연하다.

봄철마다 논·밭두렁이나 쓰레기 태우기로 인한 산불이 잇따르면서 산림당국뿐 아니라 범정부 차원에서 예방 캠페인을 하지만, 소각은 끊이지 않는다.

산림과 가까운 곳에서 허가 없이 불을 놓을 경우 최고 1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되고, 불을 피우다 실수로 산불이 나면 최고 징역 3년 또는 1천5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하지만 별 효과가 없다.

처벌과 산불 위험에도 두렁 소각이 계속되는 것은 농촌 지역의 쓰레기 수거 체계 미비와 고령화에 따른 인력 부족 탓이다.

중앙대 산학협력단이 산림청 용역으로 수행한 '심리학적 접근을 통한 소각 산불 예방 방안 연구' 결과를 보면, 농·산촌 주민의 소각 유형은 생활쓰레기가 56.3%로 가장 많았고 농업 부산물(18.8%), 논·밭두렁(14.6%) 순으로 나타났다.

농촌에서 일어나는 소각 행위가 잡초를 태워 해충을 잡기보다는 쓰레기를 처리하려는 목적이 훨씬 많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리적 접근성이 낮고 주민 수가 적어 쓰레기 수거 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은 산간 오지 즉, 산불 발생 위험이 큰 지역에서 두드러진 것으로 분석됐다.

농산폐기물 수거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산불 예방 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농촌 지역의 고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일손이 달리다 보니 생활쓰레기 처리나 논·밭두렁 잡초 제거를 맡을 인력이 없는 것도 문제다.

소각이 효과가 있다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고, 산불이 나더라도 잘 대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각보다 널리 퍼져 있는 것도 두렁 소각이 끊이지 않는 이유로 꼽힌다.

외지인 방문이 많은 관광지나 도·농 복합지역에서는 "산불은 현지 주민이 아니라 외부인 때문에 일어난다"며 소각 행위를 정당화, 합리화하는 인지 부조화 경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지난해 4월 초 밭두렁 소각으로 연달아 큰 산불이 났던 충북 단양과 충주 수안보 모두 이름난 관광지란 사실이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산불 예방 정책이 효과를 거두려면 제재와 처벌에 무게를 둔 감시에서 농산촌의 현실을 인정하고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 예방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앙대 정태연 교수는 "농촌 주민을 계도하려기보다는 소각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여건을 개선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며 "한국사회의 특성인 집합주의와 체면 문화를 활용해 공동체 리더인 이장을 중심으로 규범을 만들고 마을 단위 처벌이나 보상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k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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