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명령 반대 미 외교관 서명 폭주한 '이의통로' 제도란

입력 2017-02-01 17:35
트럼프 행정명령 반대 미 외교관 서명 폭주한 '이의통로' 제도란

1971년 베트남전 때 제도화…조직 내부 반대·이견 수렴 위해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미국 국무부엔 미국 정부 내 다른 기관엔 없는 독특한 제도가 있다.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의 외교정책에 대해 국무장관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이의 통로(dissent channel)'이다.



베트남전쟁 때 관련 정책에 대한 극심한 논란 속에 반대나 이견이 억눌리거나 무시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71년 공식적으로 제도화됐다. 40여 년 된 제도이지만, 지난해 6월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시리아 정책을 비판하고 더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촉구하는 '이의 통로' 메모가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에 보도되기 전엔 미국인들도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이었다.

외교관들이 국무부의 주요 정책에 이견이 있을 때 다른 관점과 의견을 거리낌 없이 제출토록 하되, 공무상 비밀을 지켜야 하는 복무규정을 지키고, 외교정책이 찬반 여론에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외부에 유출하지 않는 전통 때문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대한 반대 메모 내용과 서명자 수가 공개된 것은 그만큼 미국의 새 행정부 내 이견과 갈등이 극단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서명 외교관 수가 지난달 31일 오후 현재 1천 명을 넘어섰고, 추가로 수백 명이 서명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숫자는 유례없는 수준이다. 미국의 전통에 벗어난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 노선에 대한 집단적 저항 의식이나 의지를 방증한다. 지난해 시리아 메모 때는 51명이 서명했다. 이 제도의 시작은 베트남전 때문이었지만, '이의 통로'를 활용한 첫 공식 이의제기는 1971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 주재하던 아처 블러드라는 영사 책임자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방글라데시의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 전쟁 와중에 다카에 대한 파키스탄의 공격으로 인종학살 수준의 대량학살이 자행됐으나, 닉슨행정부는 파키스탄과 관계를 고려해 이에 눈을 감고 있었다.

블러드는 여러 차례 국무부에 전문을 보내 "파키스탄군의 잔악상이 조만간 드러날 것"이라며 이의 중단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국무장관에게 직보되는 공식적인 '이의 통로'를 통해 항의했다.

지난 2013년 비밀해제를 통해 이 문서가 공개됐고, 미 국무부는 그의 반대 전문을 신임 외교관 교육 과정에 포함했다. "살아있는 권력과 권위구조에 대항해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의 가치의 표본"이라는 의미에서라고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6월 보도했다.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이의제기 통로인 만큼 국무부는 내부 규정을 통해 이의제기 외교관에 대한 불이익이나 보복을 금지하고 있다. 또 국무장관은 그 내용을 국무부 고위관리들에게 회람토록 하고 회신해야 한다.

1992년 보스니아 내전 때와 2003년 이라크 침공 때도 일단의 외교관들이 이 통로를 활용해 보스니아에서 인종학살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거나 이라크 침공 계획을 반대한 사례도 있다.

물론 현실은 제도에 그려진 이상과 다르다. "이의 통로 제도 40여 년 역사에서 실제 외교정책에 대한 영향은 거의 없거나 혹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고 이 제도를 연구한 한 연구원의 말을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내부 이견이나 반대를 조용히 진화하는 데 활용됐다는 것이다.

블러드는 당시 뿔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에 의해 곧장 본부로 소환돼 인사부에 배치된 이후 제대로 외교관 경로를 밟지 못해 대사직을 거치지 못하고 은퇴했다.

그러나 블러드는 지금도 방글라데시에서 당시의 진실을 알리려 했던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방글라데시 총리의 한 고위 자문관은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때때로 미국을 비판하지만, 그 비판은 미국을 미국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미국이 개방된 사회이며 그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을 미국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레이건 행정부와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부와 국방부 고위관리를 지낸 폴 울포위츠 전 세계은행 총재는 지난달 31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국무부의 '이의 통로' 제도를 "집단사고에 빠지기 쉬운 대형 조직에서 반대 의견들을 수렴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했다.

다만, 시리아 정책 반대 메모와 이번 반 이민 행정명령 반대 메모가 외부로 유출된 것에 대해선 공직 윤리에 맞지 않는다며 "외부에 공론화하려면 사직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외교관들이 국익에 해롭다고 판단하는 이민정책에 반대하더라도 자신의 직위를 남용해 정책을 훼손하거나 방해해선 안 된다며, 개인적 양심을 지키는 3가지 방법으로 ▲이민정책과 무관한 자리로 보직 변경 요청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나쁜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 지속 ▲사직 후 반대 입장 공론화를 제시하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를 맞은 미국 공무원들 다수가 고민하는 방안들이라고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 당선 이래 미 공무원 사회의 번민을 전하고 있다.

y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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