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위해 목숨 걸었는데"…안타까운 '美입국금지' 사연 봇물

입력 2017-01-30 07:48
수정 2017-01-30 14:11
"미국 위해 목숨 걸었는데"…안타까운 '美입국금지' 사연 봇물

출산 앞둔 구글 직원 "캐나다 사는 부모님도 못 만나"

美 이민 계획한 이라크인 "내 꿈 부서져"

(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 구글의 제품관리 담당자인 사나즈 아하리(34)는 임신 37주차에 접어들면서 부모님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캐나다에 사는 부모님이 손주를 보러 미국으로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산 때 부모님이 있어 줬으면 하는 아하리의 희망은 이뤄질 수 없게 됐다.

아하리와 아하리의 부모님 모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7일 발동한 반이민 행정명령 대상국 중 하나인 이란 출신이어서다.

2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이슬람권 7개국 국적자에 대한 미국 입국금지 행정명령으로 아하리처럼 하루아침에 가족과 만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거나 인생의 항로가 틀어진 사연이 속출하고 있다.

이란에서 태어난 아하리는 20여년 전인 1996년 부모님과 캐나다에 이민을 떠났다. 캐나다 빅토리아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는 전문직 취업 비자인 H-1B 비자를 받아 미국에서 일하게 됐다.

미국에서 일하면서 미국인 남편과 결혼하고 18개월 된 딸도 뒀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아하리는 하루아침에 가족도 못 만나는 신세가 됐다.

그렇다고 아하리가 캐나다로 가서 출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회사는 재입국 여부가 불투명하다며 아하리에게 미국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구글에는 아하리 같은 입국 금지 국가 출신 직원이 187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겠다던 이라크인 라비브 알리의 꿈은 비행기에 오르기도 전에 산산이 부서졌다.

이라크에 있는 미국 보안업체에서 통역사로 오래 일한 알리는 지난한 입국 신청 절차를 밟아 마침내 비자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 28일 카타르 국제공항에서 미국 텍사스행 비행기에 탑승하려다 저지당했다. 그가 이라크의 사업체와 집을 정리하고 비행기에 오르는 사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행정명령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항에서 소리치며 항의했지만 결국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내 꿈이 부서졌다. 마지막 순간에 내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 셈"이라고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날 카이로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던 이라크인 푸아드 샤레프(51)도 비슷한 상황이다. 샤레프는 미국 구호단체인 리서치 트라이앵글 인스티튜트(RTI),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하도급업자 등으로 일하다가 2003년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후 통역사로 활약했다.

그는 미정부나 언론을 위해 일한 이라크인을 위한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 1년짜리 미국 체류 비자를 받았다. 그는 물론 아내와 세 자녀도 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며 직장과 학교를 그만뒀다. 그러나 샤레프 가족은 다음날 이라크로 되돌아가야 한다.

미국을 위해 일하면서 살해 협박 등을 감수했다는 그는 "미국을 돕겠다며 목숨까지 건 사람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트럼프가 내 인생을 망가뜨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카타르 국제공항뿐만 아니라 암스테르담, 아부다비 등 전 세계 공항 곳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미 백악관은 영주권 소지자는 반이민 행정명령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해외 공항에서 탑승 거부를 당한 사람 중에는 영주권자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에 사는 이라크인 사라 아메르는 친구들을 만나러 잠시 고향을 찾았다가 발이 묶였다. 집에 딸을 두고 왔다는 아메르는 "사람들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하룻밤 새 이렇게 규정을 바꾸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다.

상황이 이렇자 이민자 관련 단체에는 문의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

미국 아랍 차별 반대위원회의 아베드 아유브 국장은 해외에서 문의 전화가 계속된다고 전했다. 행정명령에 규정된 7개국 출신이 아닌 사우디아라비아나 파키스탄, 모로코처럼 같은 무슬림권 국가 국민 전화도 많다고 밝혔다.

아유브 국장은 "입국금지 대상국은 언제든지 늘어날 수 있다"며 "비행기 탑승하기 전 꼭 확인하라"고 당부했다.

luci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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