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에 칼부림까지 '산전수전' 할머니에게 정을 선물한 소방대원
송파소방서 지휘3팀, 설맞이 집수리·백숙 대접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어? 여기는 저번에 칼부림 난 집 아닌가?"
서울 송파소방서 지휘3팀 소속 소방관들은 설 연휴를 앞둔 이달 19일 화마를 겪은 정모(80) 할머니가 이사한 집을 찾아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해 7월 중국인이 여자친구의 집에 들이닥쳐 이웃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다치게 한 다가구주택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 할머니는 그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지휘3팀도 피해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려고 현장에 출동했는데, 정 할머니는 이미 다른 팀이 병원으로 옮긴 상태라 마주치지 못했다.
폐지를 주워다 판 돈으로 생계를 이어오던 정 할머니의 집 앞에 쌓여 있던 폐지에 불이 붙어 집이 다 타버린 것은 2015년 5월이었다. 하지만 재개발을 앞둔 지역인지라 정 할머니는 피해복구 지원을 받지 못했다.
특히 무릎 수술 후유증을 앓고 있던 정 할머니가 재래식 화장실을 힘겹게 사용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정 할머니는 화재를 겪고 나서 재개발 공사가 시작돼 송파구 거여동에서 마천동으로 집을 옮겼는데 기구하게도 이사한 집에서 칼부림을 당한 것이다.
"이게 인연인가 싶더라고요."
화재 현장과 칼부림 현장에 모두 출동한 이강균 소방관은 28일 연합뉴스 통화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이 소방관은 "집수리를 제대로 못 했던 게 늘 마음에 걸렸는데 설 연휴까지 홀로 보내실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프더라"고 말했다.
지휘3팀은 5평 남짓한 정 할머니의 새 거처를 둘러보고 사비로 5만원씩 걷어 집 정비에 필요한 물품과 가재도구를 샀다.
우선 방바닥에서 얽히고설킨 세탁기와 냉장고 전선에 정 할머니가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벽에 고정했다. 오래된 구식 형광등을 LED로 교체하고, 짐을 보관할 수 있도록 옷걸이도 설치했다.
칼부림 사건 이후로 대인기피증이 생겼다는 정 할머니는 수도 없이 많은 현장에 출동했을 소방관들이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와줘 너무나 고맙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정 할머니 슬하에는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지만, 왕래가 끊긴 지 오래라 끈끈한 정을 느껴본 지 오래라고 한다. 노령연금과 교회에서 지원해주는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삶이 팍팍하기만 했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아 기쁘다고 정 할머니는 환히 웃었다.
소방관들의 봉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설 연휴를 맞아 외롭고 쓸쓸한 할머니를 위해 '깜짝 파티'를 열었다.
지휘3팀 팀장인 장형덕 소방관의 집으로 정 할머니와 마천동 영풍노인정 할아버지들을 초청해 토종닭으로 만든 백숙을 대접하고 장수사진까지 찍어 선물했다.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지난해 7월 영풍노인정에서 음식을 요리하던 중 불이 났을 때 솥뚜껑으로 막는 등 초동 대처를 잘해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준 데 감사하다는 의미에서 장 소방관이 할아버지들을 함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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