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최대 이주 어촌'…울산 방어진 100년 전 모습은

입력 2017-01-28 10:05
'일본인 최대 이주 어촌'…울산 방어진 100년 전 모습은

일본인 500가구 거주…'하룻밤 삼치 1천마리 잡았다' 기록도

동구, '옛 거리·일본 골목' 조성해 문화관광 자원 활용

(울산=연합뉴스) 김용태 기자 = "울산 방어진의 100년 전 모습은 어땠을까?"

울산시 동구가 방어진에 '일본 히나세(日生) 골목길' 조성을 추진하면서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방어진의 옛 모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8일 장세동 동구문화원 지역연구소장은 일본의 '히나세 마을지' 등의 문헌에 일본인들이 190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방어진에서 살았던 기록이 남아 있다고 밝혔다.

기록에 따르면 1800년대 후반 조선이 개항하면서 일본 히나세 등으로부터 어부들이 방어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히 '하룻밤에 삼치 1천마리를 잡았는데 모두 다 건져내려니 배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방어진은 어족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일본 어부들은 방어진과 일본을 오가며 고기를 잡았지만 바다를 건너는 것이 위험하다 보니 점차 방어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 울산 동구에는 1897년까지 병마를 기르던 목장이 있었고, 방어진은 농민과 어민 30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일본의 어업 기술이 당시 우리보다 앞서 고기를 쓸어가다시피 하다 보니 방어진 일대 주민과 일본 어부들 사이에 다툼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잡은 고기를 처리하기 위해 방어진에 방파제를 만들고, 이곳 항구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운반선에 고기를 옮겼다.

방어진은 점차 유명한 항구로 소문이 나고, 일본과 가까워서 190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일본인 이주 어촌이 되었다. 당시 일본인이 500 가구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1908년 어업에 관련한 권리를 거주자에 한해 준다는 항구어업법이 발효되면서 일본인들의 유입이 대폭 늘어나게 됐고, 일본에서도 국가 정책으로 이주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방어진에 가면 돈벌이를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함경도 등지에서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방어진의 인구는 점차 불어나게 됐다.

당시 방어진항 중심가에 몰려 살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학교를 세우고 문화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그때 목욕탕과 극장 등이 울산에서 처음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지배 계층으로 많은 것을 누린 일본인들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허드렛일이나 심부름을 하며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아픈 역사도 있다.

방어진항에는 1923∼1928년 일본인 수산업자들이 한국인을 동원해 축조한 항구시설과 방파제 준공을 기념하는 '방어진항 방파제 축조 기념비'가 남아 있기도 하다.

이렇게 방어진에 살던 일본인들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면서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들이 지었던 일본식 가옥 몇 채는 아직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방어진회'를 만들어 교류를 이어갔다.

또 방어진에서 태어나 자랐던 일본인들 중 100여 명은 아직 생존해 방어진을 고향으로 생각하며 애정을 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구는 이에 따라 히나세 지역을 행정구역으로 통합한 일본 오카야마(岡山)현 비젠(備前)시와 2015년부터 '우호협력도시 협정'을 체결해 상호방문 등 교류하고 있다.

동구는 2020년까지 계속되는 방어진항 일원 도시재생 사업의 하나로 이러한 방어진의 역사와 문화를 관광자원으로 만들고자 한다.

방어진에 '옛 거리' 90m와 '일본 히나세 골목' 60m를 각각 조성해 지역 역사와 일본 문화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장 소장은 "동구에 현대중공업이 들어서고 방어진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남아 있던 일본식 가옥은 대부분 현대식으로 바뀌었고, 다른 유적도 사라졌다"며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 방어진의 옛 모습을 복원해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yongta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