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6천만 한류팬과 제임스 게일의 예언

입력 2017-01-31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6천만 한류팬과 제임스 게일의 예언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조선은 실로 동양의 희랍(그리스)이라고 말하고픈 나라로, 일찍이 고대 유사 이래 온갖 문화를 창조했으며 세계에서 으뜸가는 바가 있었습니다. 우선 문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서양을 떠들썩하게 했던 셰익스피어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조선으로 말하자면 임진란 이후의 인물이지만 조선에는 이미 그보다도 1천여 년 전 신라 최고운(최치원)의 문학이 당나라에 들어와 측천무후를 놀라게 하지 않았습니까?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과 같은 것은 그 웅도거업(雄圖巨業)은 접어두더라도, 단순히 문장 그것만 놓고 보더라도 천고의 걸작이며 게다가 그것은 실로 기원후 414년이라는 고대의 것에 속합니다. 그 사상, 그 문물제도에서 보아도 조선과 같이 발달한 곳은 없었습니다."



1928년 '조선사상통신'에 실린 제임스 스카스 게일 선교사의 글 '구미인이 본 조선의 장래'의 한 대목이다. 다음 표현을 보면 그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제가 조선에 온 지도 올해로 꼭 40년이 됐습니다. 그간 제가 보았던 조선! 생각해보면 그것은 실로 한 편의 활동사진입니다. 이 40년간 저는 보면 볼수록 조선 그 자체가 심오하게 여겨져 흥미를 더해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서양인'이라는 말이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변 나라들이 한국을 '미개한 나라'라고 업신여기던 시절 그는 한국을 문필의 나라, 군자의 나라로 높이 평가했다.



기일(奇一)이란 한국 이름도 지녔던 게일은 1863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엠마에서 태어났다. 토론토대에 다니던 1886년 미국에서 열린 대학생 모임에서 YMCA 지도자의 연설을 듣고 조선행을 결심했다. 1888년 12월 부산에 도착한 뒤 서울, 황해도 해주, 함경남도 원산 등지를 돌며 선교에 나섰다. 언더우드의 한영사전 편찬을 돕고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전서 등을 번역했다. 기독교사학자들은 '여호와'의 한국어 표기를 '상제'나 '천주' 대신 '하나님'이라고 정한 것을 게일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기도 한다. 성서번역위원회에서 우리말 용어를 정할 때 게일은 '유일한 분'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라고 쓰자고 적극 주장해 관철했다고 한다.



1897년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 안수를 받고 돌아온 게일은 1900년 서울 종로5가의 연못골교회, 지금의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게일은 양반, 상민, 천민 구분 없이 교회에 드나들게 하는가 하면 1904년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천민 출신 이명혁을 장로로 임명했다. 뒤이어 광대였던 임공진을 장로로 추대하려고 하자 양반 신도들이 거세게 반발해 연동교회를 떠나 묘동교회를 따로 세우기도 했다. 이상재, 이승만, 이원긍, 유성준, 안국선, 김린 등 독립협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른 양반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과 조선인 관리들이 연동교회에 입교한 것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게일은 기독교의 교리를 조선인들에게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기 위해 17세기 영국의 존 버니언이 쓴 소설 '천로역정'을 1895년에 우리말로 옮겨 펴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서양 소설이다. 게일은 책에 삽화도 곁들였는데, 등장인물들이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있고 천사의 모습은 우리 고유의 선녀를 연상케 해 미술사나 생활사적 의의도 적지 않다. 천로역정은 당시 신도들은 물론 지식인과 서민 사이에서도 널리 읽혀 선교에 톡톡히 기여했다. 길선주 목사는 천로역정을 읽다가 몸이 펄펄 끓는 성령 강림을 체험한 뒤 신도가 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이끌었다.



게일은 신도 이창직과 함께 캐나다 온타리오 공립학교 교과서를 번역한 '유몽천자'를 발간해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의 교과서로 썼고, 외국인의 한국어 학습을 돕기 위해 한국어 문법책인 '사과지남'도 펴냈다. 또 한영사전, 중영사전 등을 꾸준히 편찬했다.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과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의 가사도 게일이 번역했다. 그는 조선 시대 야담집 '천예록'과 김만중의 고대소설 '구운몽'을 영역해 영국에서 펴냈다. '구운몽'은 한국 문헌 중 전체가 외국어로 번역된 첫 작품이다. 영역이 고풍스러워 지금도 해외 한국학 학자 사이에 교과서처럼 읽히고 있다. 게일은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금수전, 홍길동전, 옥루몽, 운영전 등도 영어로 옮겼다.



그는 한국학 분야의 다양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조선의 풍물을 기록한 영문 저서 '한국 개관'과 구비문학 작품집인 '한국 민담집'을 미국에서 출간했다. 1904년에는 노름꾼 출신의 신도 고찬익을 모델로 한 논픽션 '선봉자'를 펴냈고, 선교사들의 잡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에 1924년 7월호부터 1927년 9월호까지 38회 연재한 것을 묶어 '조선 민족사'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게일은 1927년 5월 연동교회에서 은퇴한 뒤에도 1년간 더 조선에 머물며 선교와 모금 활동을 하다가 1928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여생을 보내고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오늘인 1937년 1월 31일 7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연동교회는 1988년 게일 선교 100주년을 맞아 유품 전시회와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2008년에는 캐나다에서 선교 12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했고, 2013년 2월에는 연동교회가 게일 탄생 150주년을 맞아 게일목사기념관과 게일학술연구원을 개설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한글 보급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게일 목사의 손녀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 머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절망에 빠져 있었지만 게일은 역사적으로 이어내려온 문화의 저력을 높이 평가하며 미래를 낙관했다. 그의 예언대로 한국은 모든 개발도상국이 존경하고 선망하는 나라가 됐다. 지난해 12월 전 세계의 한류 동호회원이 대한민국 인구보다 많은 6천만 명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하며 개신교 선교사에 그치지 않고 한국 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한 그의 열정과 혜안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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