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중국 제대로 알려면 史記 읽어라"
김영수 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미래 준비할 수 있는 리더 필요"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사기’(史記)는 중국 한나라 무제(BC 156~BC 87) 때 사마천(司馬遷)이 쓴 역사서다. 중국 상고 시대 다섯 임금인 오제(五帝)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재위 일정 시기까지 3천 년 역사를 담고 있다. 국가의 흥망성쇠, 명멸했던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2천 년도 더 전에 쓰였지만 ‘사기’는 지금도 ‘역사서의 모범’이란 찬사를 받고 있다.
이런 위대한 역사서의 탄생 이면에는 사마천이란 역사가의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이 있다. 그는 47세 때 한 장수를 변호하다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옥에 갇히고 반역죄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성기를 잘라내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자청하고 살아남아 ‘사기’를 완성한다. 그리고 역사 기록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김영수(59) 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은 지난 30년간 사마천과 ‘사기’ 연구에 심취했다. 사마천의 사당과 무덤이 있는 중국 산시(陝西)성을 20여 차례 찾아가 ‘사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를 파헤치고, 진짜 고향인 서촌(徐村)을 방문해 후손들을 만나기도 했다. 희대의 ‘난서(難書)’라는 ‘사기’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꾸준히 책을 내고 강연에 나서고 있다.
김 이사장은 “‘사기’는 단순히 중국의 역사책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나라가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는 도구"라며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할 기회도 제공한다"고 말한다. “세계 최고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사기’를 꼭 봐야 한다”고도 조언한다. 2천100여 년 전의 사마천과 ‘사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들어본다.
-- ‘사기’는 어떤 책입니까.
▲ ‘사기’에 ‘절대역사서’라는 별칭을 붙였어요.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에서 따왔죠. 5천 년 중국 역사 가운데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부터 사마천 당대까지 앞선 3천 년을 52만6천500자에 담았습니다. 내용, 형식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역사서의 추종을 불허하는 책이죠.‘절대역사서’란 이름이 무척 어울립니다.
또 역사적인 인물의 전기(傳記)를 통해 한 시대의 역사를 구성하는 역사 서술 체제인 기전체(紀傳體)의 효시입니다. 왕의 이야기를 담은 본기(本紀), 역사를 시ㆍ공간으로 정리한 표(表), 제도와 문물을 살핀 서(書), 역사를 움직인 신하 이야기를 담은 세가(世家), 다양한 인간상을 기술한 열전(列傳)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 다섯 체제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표를 보면 본기나 세가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소개돼 있고, 중요한 인물의 죽음이나 사건을 기록해 세가나 열전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특히 우리가 중요한 것을 형광펜으로 표시하듯 글자를 뒤집어서 나타냈어요. 또 열전은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전개를 보이는데 이런 점이 꽤 매력적이죠. 3천 년이란 긴 시간을 52만6천500자로 압축하되 기전체라고 하는 서술체제 속에서 적절하고 절묘하게 분산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내용을 전달하는 역사책이기 때문에 읽을수록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 ‘사기’를 연구하신 지 30년 됐습니다. 어떻게 인연을 맺었습니까.
▲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사나 한중 관계 연구자들이 ‘사기’라는 텍스트에는 굉장한 관심을 가지면서 저자인 사마천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하고 오해와 편견이 있습니다.
1987년 ‘사기’를 텍스트 위주로 공부하던 중 역사가 사마천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서 파고들게 됐어요. 사료에 대한 신뢰는 역사가를 검증해야 확인되지 않겠습니까. 박사과정 시작하면서 깊이 있게 공부하다 보니 사마천이란 인간에 매료됐죠. 지금은 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됐습니다.
-- 사마천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고 들었습니다.‘사기’가 완성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 여러 주장이 있지만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태어났다고 봅니다. 어린 시절을 평범하게 보낸 사마천은 스무 살에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권유로 중국 곳곳을 수차례 여행하고, 28세 전후로는 사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아버지도 사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관으로 ‘태사령’이란 벼슬까지 오른 사마천은 47세 때 흉노와의 싸움에 패한 이릉(李陵)이란 젊은 장수를 변호하다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옥에 갇히고, 이어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하지만 그냥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사기’를 끝마쳐야 하는 소명이 있었죠. 당시 사형수가 살아남는 방법에는 엄청난 돈을 내거나 성기를 자르고 내시가 되는 것(궁형ㆍ宮刑)이 있었습니다. 사마천은 궁형을 선택하고 살아남아 낮에는 황제의 심부름을 하다가 저녁이면 각종 사료를 검토하고 책을 썼어요.
이런 치욕스러운 형벌을 자청하면서 살아남은 것은 역사서를 저술하겠다는 소명의식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내용을 바꾸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됩니다. 붓으로 무제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죠. ‘사기’에는 무제를 교묘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사마천의 어떤 부분에 매료됐습니까.
▲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씩 어려운 고비를 겪게 되죠. 위기를 헤쳐나간 방식에 따라 인간의 존재감이 달라지죠. 저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자세로 공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어요.
사마천은 무척 슬픈 삶을 살았지만 시대가 준 책임감, 역사를 기록하는 사서 집안에 대한 자부심, 지식인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처절하게 끌어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기’를 세상에 내놓아 인류에 정신적으로 큰 선물도 줬죠. 그런 부분에 가장 매료된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 지식인을 보면 안타까워요. 많은 이들이 권력을 추구하며 타락하고 자기의 역할이나 소임도 모르고 있죠. 국민이 망가지는 지식인을 보면서 크게 실망을 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사마천의 삶과 ‘사기’가 던지는 메시지는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궁형이 사마천의‘사기’ 저술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 궁형 후 살아남았지만 몸이 망가져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죠. 그러니까 빨리 써야 했어요. 어떤 분들은 52만6천500자가 대단히 많다고도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의 기록이 5천만 자 정도니까 글자 수로는 100분의 1에 불과하죠. 3천 년을 52만6천500자로 줄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거에요.
‘사기’를 희대의 난서라고 하는데 바로 ‘압축파일’이기 때문에 어려운 거죠. 고뇌하며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는데, 이런 치욕적인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마천에게 초인적인 천재성을 발휘하게 한 것 같아요.
궁형은 또 사마천을 관변 역사가에서 진보 지식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봉건 왕조 체제에서 사관은 소위 공무원이었죠. 황가 도서관을 이용하고 황제의 명을 받아 일하는 사관으로서 한나라와 무제에 대한 칭송을 염두에 뒀을 것으로 생각해요.
반역죄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 궁형을 자청하기까지 과정에서 180도 방향 전환이 이뤄집니다.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 아이로니컬하게도 개인적인 불행사와 관련됐죠. 그런 비극이 없었다면 ‘사기’는 상당히 무미건조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기’는 내용이 깊을 뿐만 아니라 넓기도 합니다. 특히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인 열전을 보면 어떻게 이 많은 것을 기록했는지 궁금해지죠. 스무 살 때 중국 각지를 여행한 것이 이런 넓이를 결정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런 차원에서 ‘사기’에서 열전이 가장 마지막에 쓰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거기에는 사마천의 많은 고뇌와 생각이 담겨 있죠.
-- 생사를 넘나드는 삶은 사마천이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 같은데요.
▲ 사마천은 절체절명의 극단적인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사기’에도 죽음의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어요. 사람은 어떻게 살다 죽는가가 중요하죠. ‘사기’에는 자결에 관한 대목이 200가지나 나옵니다. 절반은 반란을 꾀했다 실패해 자살하는 인물에 관한 것이지만 나머지는 자기 소신을 위해,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자존심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야기입니다.
사마천은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자살을 죄악으로 보지만 당시 자결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죽음의 한 형태였죠. 그런 점에서 자결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있죠.
-- ‘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 우리는 어떤 인물에 주목해야 할까요.
▲ 일단 지도자인 왕들을 봐야 합니다. 역사는 결론이 난 사건이죠. 그런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해요. 흔히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라고 얘기하지만 저는 끊임없이 가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우의 수에 대한 훈련, 즉 시뮬레이션하는 거죠. 시뮬레이션을 통해 또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공부와 훈련이 필요하죠. 역사적 사건에는 정치 제도, 리더십, 보좌하는 인재들의 문제, 지도자가 백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모두 연계돼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역사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정농단 상황도 역사를 공부하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사마천은 성공했거나 실패한 지도자의 결말을 보여주면서 현대 지도자들에게 리더십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주죠.
‘견미지자’(見微知者)란 말이 있습니다. 아주 미세한 것을 보고 드러날 것을 안다는 뜻이죠. ‘은본기’에 보면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 임금은 상아 젓가락을 썼다고 해요. 당시 상아는 멀리 남쪽 나라에서 온 아주 귀한 것이었죠. 신하인 기자는 이를 보고 은나라의 멸망을 예견합니다. 밥 먹는데 그 정도 귀한 것을 쓴다면 앞으로 못할 짓이 없다고 생각한 거죠. 결국 은나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통치자가 행하는 미세한 부분을 보면 나라가 어디로 향할지 엿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바닷물 논리’라고 하는데 바닷물을 다 마셔봐야 맛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리더가 필요합니까.
▲ 인재란 데려다 쓰는 존재가 아니라 모셔서 따라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중국 인재학의 기본입니다. 리더는 국민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듣고 필요한 것을 정책에 반영하면 되는 겁니다. 자꾸 끌고 가려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죠.
또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오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입니다. 현실적인 위기를 돌파하고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고 준비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 사실 사마천이나 ‘사기’가 최근까지 크게 부각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 권력자 입장에서 ‘사기’는 부담이 큰 책이죠. 정치 체제나 통치자에 대한 비판이 많아서 웬만한 자신감이 없다면 내세우기 어렵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자객열전’에는 춘추시대 말기 진나라의 실권자 조양자를 수차례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죽은 예양이라는 자객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지금 중국 산시성에 가면 예양을 기리는 사당이 있어요. 하지만 관리가 거의 안 되고 있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에 관한 장소지만 정부 입장에서 자객을 지원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겠죠. 이렇듯 ‘사기’는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부분이 많아서 지금까지 배제됐어요. 하지만 최근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상당한 자신감을 보이며 ‘사기’를 부각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재 중국에서 사마천의 제사는 황제, 공자와 함께 중국 3대 제사로 꼽힙니다. 두 제사는 2천 년 이상 지속해 왔지만 사마천의 제사는 2007년에야 무형문화유산으로 격상됐고, 2010년 이래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거대한 조각상과 건축물도 들어섰죠. 그만큼 자신감이 생긴 거죠. 저서에서‘사기’를 자주 인용하는 시진핑 주석의 고향이 인근에 있는 것도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 ‘사기’에 우리나라에 관한 기록도 나오는데요.
▲ ‘사기’에는 ‘조선열전’이란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죠. 안타깝게도 고조선의 멸망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니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조선열전’의 기록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마천이 38세에 고조선이 멸망했죠. 이것은 곧 당대 역사의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사가로서 사마천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중요하게 여겨야 하죠. 여기에는 우리나라 고대사의 여러 문제와 쟁점이 내포돼 있고, 해결의 실마리도 있습니다.
-- 사마천의 고향을 20여 차례 방문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 1998년 산시성 한청(韓城)시를 처음 방문해 사마천의 사당과 무덤을 봤을 때죠. 2천100여 년 전 위대한 역사가를 만나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듬해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사마천이란 역사가에 매료돼 파고들며 인생이 바뀌었죠.
또 한 가지는 사마천의 후손을 만난 겁니다. 후손들이 지금까지 한청시 서촌(徐村)이란 곳에서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는데 성이 ‘사마’(司馬)가 아니라 ‘동’(同)과 ‘풍’(馮)이에요. 후손들에 따르면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은 또다시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사형을 당했다고 해요. 화를 피해 후손들은 잠시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와 마을을 둘로 나눠 살게 됩니다. ‘사’와 ‘마’를 분리해 하나씩 사용하며 부수를 추가해 성을 바꾸고 살아온 거죠. 물론 사마천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 2천100여 년 전의 사마천과 중국 역사서인‘사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까.
▲ 사마천은 역사의 진행 과정을 깊이 있게 통찰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래서 ‘사기’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들은 바로 우리가 삶을 돌아보고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 사마천은 인간관계에 매우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줄 수 있죠.
한편 중국은 미국의 군사력을 위주로 하는 하드파워 전략에 대한 대응으로 소프트파워 전략을 펴고 있습니다. 경제력으로 세계인의 물질적인 생활에 파고들고, 문화를 통해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거죠.
소프트파워 전략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콘텐츠는 바로 역사와 문화예요. 지난 10년간 전 세계 500곳 가까이에 공자문화원이나 공자아카데미를 세운 것도 그런 차원이죠. 중국 역사책의 최고봉인‘사기’는 소프트파워 전략의 강력한 텍스트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려면 수많은 인물과 지명, 문화를 볼 수 있고 가장 중국다운 모습을 담은 ‘사기’를 봐야 합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2월호 [인문학 이야기]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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