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을 기다린 복수 끝에 남은 것은… 연극 '조씨고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중국 진나라 시대, 왕의 총애를 받는 문인 '조순'을 시기한 무인 '도안고'는 '조순'에게 반란죄를 씌워 그의 가문 300여명을 몰살한다.
그러나 옛이야기가 흔히 그러하듯 그 가운데서도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 살아남는다. '조순'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시골의원 '정영'은 자신의 아이와 부인을 희생하면서까지 마지막 남은 핏줄 '조씨고아'를 살려내고 자신의 아들로 키운다.
이를 모르는 '도안고'는 '조씨고아'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고 '정영'은 20년이 흘러 장성한 '조씨고아'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며 '도안고'에 대한 복수를 당부한다.
알고 보니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가 사실은 가문의 '철천지원수'였다는 식의 스토리는 영화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연출가 고선웅은 중국 원나라 작가 기군상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재기발랄하게 풀어낸다.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희극과 비극을 적절히 섞어가며 풀어낸 장면들에 '피식' 웃음을 짓던 관객들은 정영이 '조씨고아'를 살리고자 애쓰는 장면부터 손수건을 꺼내기 시작한다.
정영이 '조씨고아'를 살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고자 마흔 다섯 살에 어렵게 얻은 자신의 친자식을 희생시키고 이에 아이의 무덤에서 자결하는 정영의 처, 오열하는 정영의 모습에서 비극은 절정에 이른다.
원작에 없지만 고 연출의 각색을 통해 탄생한 캐릭터인 정영의 처는 이야기에 개연성을 불어넣으면서 동시에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정영의 기구한 처지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가문의 복수를 한 '조씨고아'는 복수를 마쳤다며 기뻐한다.
그러나 복수만을 위해 20년을 기다린 '정영'은 웃음 짓지 못한다. 그토록 미워하던 '도안고' 가문까지 절멸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2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이지만 '도안고'역의 장두이부터 '조씨고아'역을 맡은 이형훈까지 주·조연을 가리지 않은 배우들의 열연과 빠른 줄거리 전개, 리듬감과 속도감이 있는 대사 등으로 지루할 틈이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특히 극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정영'역의 하성광은 모든 것을 희생한 뒤 20년을 기다린 복수의 끝에 남는 공허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줄거리와는 상관없는 인물인 검은 옷을 입은 '묵자'(墨子)가 검은 부채를 들어 등장인물의 죽음을 알린다거나 장면을 정리하는 식의 구성도 깔끔하다.
쉴새 없이 관객을 웃기고 울렸던 연극은 묵자의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 소리에 맞춰 놀다보니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보면 어느새 늙었네.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공연은 2월12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계속된다. 이어 지방 공연이 예정돼 있다. 입장권 R석 5만원, S석 3만5천원, A석 2만원. 문의 ☎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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