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 종이의 미래에 대한 답…"종이는 문명의 모세관"

입력 2017-01-13 18:43
디지털 시대 종이의 미래에 대한 답…"종이는 문명의 모세관"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한국은행이 2020년까지 '동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작년 말 발표하자 지폐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은행권에서는 올해 9월부터 종이 통장을 폐지하겠다고 일찌감치 예고한 상황이다.

종이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는 곳은 금융권만이 아니다.

직장인들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일정을 관리하고, 아기 엄마들은 육아 일기를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에 기반을 둔 전자책 시장은 점차 세를 불리고 있다.

인류가 종이와 사실상 결별하게 될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독일의 비평가인 로타어 뮐러 베를린 훔볼트대학 명예교수가 건네는 답이 '종이: 하얀 마법'(알마 펴냄)이다.

저자는 서구 문명의 제지사를 통해 종이가 문명 구석구석에 모세혈관처럼 뻗어 가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 후한의 환관 채륜이 만든 종이는 실크로드를 따라 아랍권으로 전해졌고, 파피루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3세기 아랍권으로부터 제지술을 받아들인 유럽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종이에 채색한 카드는 대중의 주요한 오락거리가 됐고, 상인들 사이에서는 근대적인 신용 매체의 역할을 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1527~1598)를 비롯한 왕들은 서면 보고를 선호함으로써 종이를 통한 행정통치 확산에 기여했다.

종이가 중세 수도원이나 대학에서 지식의 축적과 전파라는 가장 중요한 역할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15세기 중반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기 이전부터 종이는 이미 다양한 형태로 인간과 인연을 맺어온 것이다.

그 때문에 책이나 신문 등 인쇄 매체의 기원이 '구텐베르크 시대'에 있다고 인식하기보다는, 더 오래되고 광범위한 '종이 시대' 개념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강조점이다.

종이는 이후에는 우편과 결합한 서신, 인쇄기를 통한 신문 등의 형태로 확대되면서 현대 문명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괴테의 '파우스트',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등 위대한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종이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프랑스 작가 폴 발레리의 1932년 강연 내용처럼 "현대 문명에서 종이가 차지하는 편재성과 필요불가결성"을 느끼고 나면 디지털 시대 종이의 운명을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박병화 옮김. 468쪽. 1만9천800원.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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