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천 칼럼] 오바마의 아름다운 퇴장과 민주주의

입력 2017-01-13 11:14
[한기천 칼럼] 오바마의 아름다운 퇴장과 민주주의

(서울=연합뉴스) "민주주의란 획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창립자들은 싸우면서 타협했고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기를 바랍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마바의 퇴임 전 마지막 연설은 보는 이들에게 신선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줬다. 8년 간의 백악관 생활을 마감하는 고별인사에서 오바마는 일체의 획일성을 배척하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을 새삼 일깨워줬다. 많은 사람이 잊고 지내기 쉬운 평범한 원칙이었기에 그 떨림은 더 컸다. 연설 장소는 오바마의 정치적 고향으로 일컬어지는 시카고의 매코믹 플레이스였다. 겨울비가 온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였는데도 행사장은 1만4천여 청중이 내뿜는 열기로 뜨거웠다. 열띤 함성과 70여 차례의 기립박수는 장내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청중은 '4년 더', '아이 러브 유' 같은 구호를 목청껏 외치며 사랑하는 대통령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청중의 뜨거운 반응에도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자신의 개혁정책을 비판해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을 단 한마디도 비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러 차례 반복해 국민의 화합과 연대를 강조했다. 지난 대선이 남긴 국민적 갈등과 분열을 다독이는 데 마지막 열정을 쏟았다. 남의 나라 대통령이지만 부러운 마음을 누르기 어려운, 지혜롭고도 의연한 지도자였다.



미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오마바는 성공적인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는 2009년 1월 '변화와 희망'을 화두로 내걸고 '담대한' 개혁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은 다소 추상적이고 소박한 듯했지만 끝은 구체적이고 눈부셨다. 대표적인 치적으로 꼽히는 '오바마케어'가 대표적인 예이다. 의료 소외계층의 건강보험 혜택을 대폭 확대한다는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추진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서민층에서는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일부 백인들과 노년층의 반대로 대립과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하지만 오바마는 유연한 소통과 끈질긴 설득으로 거센 반대의 물길을 우호적인 방향으로 돌렸다. 취임 이듬해 4천900만 명이던 건강보험 미가입자가 2015년에는 2천900만 명으로 40.8% 줄었다. 미가입자 비율도 16%에서 9.1%로 크게 떨어졌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침체에 빠졌던 미국 경제를 신속히 회복시킨 것도 오바마의 업적으로 꼽힌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취임 첫해 마이너스 2.8%까지 추락했던 경제성장률은 그 이듬해에 플러스 2.5%로 반전했고 그후로도 2%대 중반의 성장세를 이어갔다. 2009년 7.8%였던 실업률은 2016년 4.7%로 떨어져 사실상 완전고용이 실현됐다. 고용은 75개월 연속 증가세를 달려 1천5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다.

대외 부문에서도 오바마는 중동평화 중재, 미·러 전략무기감축 추가협상 등 굵직굵직한 성과를 냈다. 국제사회는 노벨평화상으로 그의 공을 빛냈다. 2012년 재선 이후 두 번째 임기에는, 반세기 동안 적체된 쿠바와의 적대관계를 청산해 국내외 칭찬을 한몸에 받았다. 지난해 3월에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88년 만에 '에어포스 원'(미 대통령 전용기)을 타고 쿠바를 방문해 세계인의 뇌리에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 오바마가 '전략적 인내'라는 소극적 대북 정책을 고집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기술 고도화를 방치한 것과 마찬가지가 됐다. 북한이 핵 포기를 선언할 때까지 대화 채널을 봉쇄한 채 압박한다는 오바마의 구상은 지난해 북한이 강행한 두 차례 핵실험으로 일거에 빛을 잃었다.

두 달 전 CNN방송 여론조사에서 오바마의 지지율은 57%로 나왔다. 취임 첫해 58%를 기록한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다. 8년에 걸친 대통령 재임 첫 해와 마지막 해 지지율이 60%에 근접하며 비슷하게 나온 것은 오바마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얼마나 두텁고 깊은지를 보여준다. 그런 오바마가 국민 호감도 37%(1월 10일 퀴니피액대학 여론조사)의 트럼프에게 통치권을 넘겨주고 퇴임한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선거제도의 또 다른 역설이다.

민주주의 체제의 대통령 선거는 승자한테 과반의 독식을 허용한다. 당선자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들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사표(死票)가 된 그들의 표심을 포용하고 달래 국민적 화합을 이끌어 내는 것이 승자의 중요한 과제로 남는 것이다. 선거가 남긴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것은 민주주의 제도가 승자에게 내리는 지상명령이다. 이를 외면한 채 오만과 독선의 비탈길로 내달리는 승자는 결국 민주적 헌정체제를 수렁에 빠뜨리곤 한다. 그래서 정치적 성향이 다른 상대방의 생각과 취향을 인정하는 관용성이 민주주의의 주요 덕목으로 꼽히는 것이다. 바로 오바마가 퇴임 연설에서 국민에게 당부한 그 관용성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과 대통령 탄핵 사태로 온 국민이 극심한 혼란에 고통받고 있다. 고장 난 '대선 시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거전의 개시 신호를 성큼 앞당겼다. 대망을 품고 레이스에 나선 대선 주자들이 잠시나마 숨을 고르고 오바마의 고언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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