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고종의 러시아공사관行은 피란 아닌 정치적 망명"
황태연 교수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고종은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자 이듬해 2월 11일 거처를 경복궁에서 중구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파천'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는 행위를 말한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한양을 벗어나 남한산성에 들어간 것이 파천이다.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894∼1896년 역사를 정치철학의 시각으로 조명한 신간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에서 1896년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이어(移御)를 파천이 아니라 정치적인 '망명'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고종은 1896년에 지방에 간 것이 아니라 도성 안에서 거처를 이동했을 뿐이고, 경복궁은 왜군이 들이닥칠 난리 직전 상황이 아니라 이미 군사적으로 점령된 상태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고종은 적군에 대한 항전을 위해 투쟁본부를 외국이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안전지대로 옮긴 것이라고 강조한다. 국제법적으로 망명은 "외국에서 비호권을 구하고 얻는 것"이고, 러시아공사관은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고종의 행동은 망명이었다는 논리다.
저자는 1894년 군국기무처가 주도한 개혁인 '갑오경장'도 친일 세력이 왕권의 무력화와 일제의 경제침탈 기반 조성을 야기했다는 점에서 '갑오왜란'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일제는 그해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을 정복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냈고, 군대를 파견해 서울을 점령하고자 했다. 동학농민군과 의병의 눈에는 1894년 일본군이 벌인 일련의 행동들이 전란으로 비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갑오왜란이 역사책에서 실종되고, 아관망명은 의미가 축소돼 아관파천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역사학자들의 '식민사관'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그는 "갑오왜란부터 아관망명까지의 국가 상황은 '전쟁상태'로 인식해야 한다"며 "국사학계가 실종시킨 전쟁을 역사적으로 복원해 비상하고 긴박했던 당시 역사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래야 1894∼1896년을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가장 장엄하고 위대하며 창조적인 역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갑오경장의 이면에 일제의 군사 침략이 있었고 아관파천의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지 않았다는 저자의 지적은 수긍할 만하지만, 역사를 지나치게 민족 중심으로 해석했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제기될 소지도 있다.
저자는 1897년 이후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대한제국과 갑진왜란'도 올 상반기에 펴낼 예정이다.
청계. 732쪽. 4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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