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한국카메라박물관 가보니
전 세계 카메라 발자취가 고스란히 있었다
(과천=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카메라는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다. 1839년 처음 등장한 이후 근현대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 인간의 일상을 렌즈에 담아 기록을 남기는 도구로 활용됐다.
지금은 스마트폰의 핵심기능으로 장착될 정도로 현대인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카메라박물관은 전 세계 카메라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카메라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손기정(1912~2002) 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 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손 선수는 힘에 부친 듯 이를 악문 얼굴을 오른쪽으로 살짝 젖힌 채 왼손으로 결승선을 감싼 듯 붙들고 있다. 손 선수 뒤편으로 멀리 관중석에 앉은 이들의 형체는 흐릿하게 뭉개져 보인다. 이 사진은 멀리서 망원 렌즈를 이용해 찍은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어떤 카메라로 찍은 것일까. 경기도 과천에 있는 한국 카메라 박물관에 바로 실마리가 있다.
2층 상설전시실 진열대에 놓인 콘탁스 Ⅱ 라이플은 장총 개머리판에 카메라를 얹은 특이한 형태다. 총을 쏘듯 방아쇠를 당기면 셔터가 작동한다. 흔들림을 최소화해 선수들의 빠른 움직임을 찍기 위해 4대만 특수제작됐다고 한다. 두 대는 훼손돼 사라졌고, 한 대는 어느 수집가가 가져갔는지 종적을 감춰 실물을 볼 수 있는 곳은 세계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어쩌면 이 카메라가 손 선수의 모습을 담은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한국 카메라 박물관에서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카메라들을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카메라와도 조우할 수 있다.
◇ 카메라와 렌즈의 세계에 빠지다
한국카메라박물관은 김종세(66) 관장의 집착과 열정의 산물이다. 김 관장 생애 첫 카메라는 일본제 아사히 펜탁스 K2. 1976년 취미로 사진을 배우기 위해 직장생활 두 번째 월급을 털어 샀다고 한다.
“처음엔 카메라를 모으겠단 생각은 못 했죠. 판잣집에 살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으니까요. 사진을 배우다가 1980년대 초 제 인생 두 번째 카메라인 독일제 콘타플렉스 BM으로 사진을 찍어보니까 아사히 펜탁스 K2와는 차이가 크게 나는 거예요. 그때부터 카메라에 집착하게 됐습니다. 사실 카메라보다는 렌즈에 집착한 겁니다.”
간판 만드는 일을 하며 비싼 카메라를 쉽게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얼마 후 광고대행사를 운영하며 제법 여유가 생기자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사들일 수 있었다. 한번 구매한 카메라를 되파는 성격이 못돼 카메라는 자꾸만 늘어났다.
◇ 크리스티 경매장의 '큰손'…120여 개국 다니며 카메라 수집
김 관장은 1989년 디자인학원을 세우기도 했다. “후배들과 사회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오래된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문을 닫아야 했다. 다시 한동안 “뭘 해야 할까?” 고민했다. 취미로 했던 카메라 수집이 떠올랐다. 막연하게 카메라 박물관을 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박물관에 대한 막연한 꿈은 1996년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카메라 수집가를 만나면서 구체화됐다. 카메라 박물관 개관을 추진했다는 수집가는 나이가 들고 건강도 좋지 않아 본인 소유 카메라를 싼값에 주겠다고 했다. 좋은 기회였다. 빚을 내서 카메라 400여 대를 사들였다.
1998년부터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을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었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카메라를 사기 위해서다. 김 관장은 경매에 나온 카메라 중 30% 정도를 구매할 정도로 카메라 수집에 열을 올렸다. 한번 마음먹으면 반드시 사야 해서 경매 가격이 예상보다 많이 높아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경매장 관계자로부터 “영주권도 주고, 모든 편의를 제공할 테니 런던에 박물관을 열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틈이 날 때마다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등 전 세계 120여 개국을 다니며 카메라를 사모았다.
이렇게 사들인 이유에 대해 김 관장은 “박물관 운영자는 컬렉터(수집가)와 다르다”며 “컬렉터는 물건의 환금성이나 되팔았을 때의 이익 여부를 생각하지만, 박물관 운영자는 그 물건이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다”고 설명했다. 김 관장은 마침내 2004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본인 소유 건물 지하에 우리나라 최초 카메라 박물관을 개관했다. 2007년에는 좀 더 많은 이들이 찾아올 수 있게 경기도 과천에 새 건물을 짓고 박물관을 이전했다.
◇ 눈앞에 펼쳐지는 카메라 변천사
서울 지하철 4호선 대공원역 4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한국 카메라 박물관은 외관이 독특하다. 카메라 몸체와 렌즈를 절반으로 자른 모습이다. 무한한 우주 공간을 촬영하는 카메라의 단면을 건물에 담았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카메라 3천여 대를 비롯해 렌즈 6천여 점, 유리원판 필름과 초기 환등기, 사진 인화기, 액세서리 등 김 관장이 30년 이상 수집한 보물 같은 카메라와 부속 1만5천여 점이 소장돼 있다.
박물관은 2층, 1층, 지하 순으로 돌아보는 것이 좋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카메라가 처음 발표된 1839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단위로 카메라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품이 진열돼 있다. 카메라의 기원과 원리도 배울 수 있다.
카메라의 원조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와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은판사진법) 등 카메라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명품을 만날 수 있다. 해당 시기 국내외 역사가 소개돼 있고, 당시 촬영된 사진도 함께 진열돼 있다. 1930년대 콘탁스 Ⅱ 라이플과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당시 모습을 담은 책을 볼 수도 있다. 1907년 영국의 마리온 사가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든 명품인 소호 리플렉스도 만날 수 있다.
이밖에 1955년 제작된 남대문 필드, 1960년대 전남 순천에서 제작된 동남 뷰 카메라, 대한광학이 자체 기술로 1976년 내놓은 코비카 35 BC 등 국산 카메라와 기관총 모양 군사용 카메라, 1940년대 일본 해군 카메라도 눈길을 끈다.
◇ 스위스 정밀산업 엿볼 수 있는 기획전
1층은 특별기획전이 열리는 공간이다. 그동안 ‘라이카 카메라 특별전’ ‘라이카 모방 카메라 특별전’ ‘군용 카메라 특별전’ 등이 열렸고, 지난해 7월부터는 스위스 예술품을 만날 수 있는 ‘스위스 카메라 특별전’이 진행되고 있다. 이 특별전은 1944년부터 1989년까지 생산된 알파 카메라가 중심이다. 고급 소량 생산방식을 추구한 알파 카메라는 45년간 40가지 모델, 약 4만2천 대가 생산됐다. 특별전에서는 32개 모델, 110여 점의 카메라와 무비카메라, 주변기기가 전시되고 있다.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모델은 스위스에서 제작하고 영국 콤파스사가 판매한 콤파스 Ⅱ. 담뱃갑 3분의 2 크기의 앙증맞은 은색 카메라지만 카메라의 모든 기능이 함축돼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1920년대 들어 독일 카메라에 주도권을 빼앗긴 영국이 독일제 라이카를 넘어서기 위해 1938년 4천~5천 대를 생산했다고 한다. 이 카메라는 김 관장의 애장품이기도 하다. “책에서 이 카메라를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 2년간 찾아다녔어요. 구하고 싶은 욕구가 대단했죠. 2000년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겨우 샀습니다. 예쁘지만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단점은 있죠.”
◇ 가슴을 두드리는 장엄한 톈산산맥
박물관 지하 1층에서는 제9회 김종세 사진전 ‘산세’(山勢)가 진행되고 있다. 카메라 수집가이자 사진작가인 김 관장은 매년 이렇게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중국 신장성에서 바라본 톈산산맥과 주변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LED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사진전은 오는 3월 말까지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카메라 관련 체험 학습과 문화 강좌도 진행된다. 카메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바늘구멍으로 사진 만들기,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한 그림 그리기, 암실에서 진행하는 흑백사진 만들기 등을 통해 카메라의 원리를 이해하고 친숙해지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한국카메라박물관은 매주 월요일과 명절에 휴관한다. 관람 시간은 동절기(11~2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절기(3~10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료는 어른 4천원, 청소년ㆍ어르신 3천원, 어린이 2천원. ☎ 02-502-4123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2월호 [박물관]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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