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리더십>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가난한 환자들 점점 외면받아…고인의 베푸는 의료정신 더욱 간절"
(부산=연합뉴스) 이종민 기자 =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가난해서 먹을 게 부족했던 시절. 의사는 집에 먹을 것이 없다는 환자의 말을 듣고 처방전에 이렇게 썼다.
"이 약을 먹으면 차도가 있을 것이니 며칠 뒤에 다시 찾아주시오. 돈이 없어도 되니 꼭 오셔야 하오."
한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가난한 이를 위해 의술을 펼친 성산(聖山) 장기려(張起呂·1911∼1995) 박사.
그가 1951년부터 부산복음병원 원장으로 있던 1976년까지 가난하고 돈 없는 환자를 위해 헌신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국내 의료보험의 모태가 된 의료보험조합을 처음으로 만든 이도 그였다.
장기려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장 박사에 대해 우리 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평생 보듬고 돌본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손 이사장은 "그가 후대에 남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를 꼽는다면 의료조합 설립"이라며 "단지 가난한 사람을 감정적으로만 도운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 끝에 탄생한 것이 청십자의료조합"이라고 평가했다.
평양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장 박사는 1951년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 영도에서 복음병원을 설립한다.
당시 환자들은 대부분 피난민이거나 행려병자들이었다.
가난한 형편 탓에 입원비나 치료비를 내지 못하자 대부분 무료로 환자를 진료했다.
그러나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무료 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그는 1968년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의료조합 설립은 국내 처음이었다.
설립 당시 표어는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였다.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뜬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은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됐다.
손 이사장은 "복지 개념의 한국 의료보험이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부러움을 사게 된 것은 장 박사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1932년 서울대 의대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를 시작했을 때 그의 신조는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의사 가운을 입은 날부터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웃들의 벗을 자처하며 이들을 식구처럼 돌보고 사랑으로 의술을 펼쳤다.
수술비가 없는 환자에게 자기 월급으로 병원비를 대신 내주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병원비를 낼 수 없는 딱한 사정을 듣고는 환자를 원무과 직원이 모르게 야밤에 탈출시키기도 했다는 일화도 많다.
장 박사는 우리 의학계에 매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의사였지만 그의 일상적인 삶은 너무나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한평생을 집 한 칸 없이 고신대복음병원 옥탑방에 기거했다.
1995년 12월, 84세로 생을 마감할 때 그에게는 집 한 채도, 죽은 후에 묻힐 땅 한 평도 없었다.
장 박사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면서도 의사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43년 국내 처음으로 간암 환자의 암 덩어리를 떼어내는 수술에 성공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의학계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수술을 최초로 성공한 것이다.
1959년에는 국내 최초로 간의 70% 가량을 들어내는 간 대량 절제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웃들을 향한 그의 희생정신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1979년에는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사후인 1996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고, 2006년에는 임상의사로는 허준에 이어 두 번째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그의 희생·봉사 정신은 후대로 이어지고 있다.
장기려기념사업회는 2013년 부산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 주변에 장 박사를 기념하는 '더 나눔' 기념관을 세웠다.
장 박사의 나눔 활동, 업적, 일화들이 센터 곳곳에 전시돼 있다.
고신대복음병원과 부산 서구청은 2015년 3월 병원 앞 감천로 구간 822m를 '장기려로(路)'로 지정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임학 고신대복음병원장은 "장 박사는 우리 사회, 후세 의료인들에게 남긴 유산이 너무나도 크신 분"이라며 "생전에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두고 '바보 의사'라고 불렀는데 가난한 환자들에게 조건 없이 나눔 의료를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 병원장은 "요즘의 의료는 너무 경쟁화돼 보험 적용이 안되는 비급여 진료를 권장하는 의료진도 많아 가난한 환자들은 병원에서 점점 외면받고 있다"며 "병원의 주머니를 채우는 데 급급한 요즘, 고인의 베푸는 의료 정신이 더욱 간절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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