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수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섰다. 87세 세입자의 강제퇴거 장면이 확산하면서 그동안 쌓여 온 주거난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AP, AFP통신에 따르면 시민 수만 명은 지난 26일(현지시간) 수도 마드리드 도심을 행진하며 정부에 주거비 인하와 세입자 보호 조치를 촉구했다.
시위대는 마드리드 번화가인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약 100개의 텐트를 치고 26일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인 27일 밤에는 가족 단위를 포함한 더 많은 인파가 야영 시위에 합류해 스페인의 주택 위기를 규탄했다.
이번 시위의 발단은 87세 여성 세입자의 강제퇴거다. 마드리드의 부촌 레티로 지구에서 70년 넘게 살아온 마리아 델 카르멘 아바스칼은 지난 23일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어온 뒤 들것에 실려 집을 떠났다.
퇴거 현장을 담은 영상이 스페인 전역으로 퍼지자 임차료와 주택 매입 비용 상승으로 끓어오르던 여론이 폭발하고 말았다.
마드리드 세입자 연합에 따르면 아바스칼은 부모 세대부터 이어 70년 넘게 이 아파트에서 세입자로 지내 왔다.
2018년 건물 소유주가 바뀌면서 아바스칼에게 아파트를 살 기회가 주어졌지만, 경제 사정상 감당할 수 없었다.
이후 이 아파트를 사들인 부동산 투자 회사는 월세를 500유로(77만원)에서 2,650유로(410만원)로 크게 올렸다. 나중에 1,650유로(255만원)로 낮췄으나, 이 역시 아바스칼의 연금으로는 부담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결국 그는 평생 살아온 집에서 쫓겨났다.
퇴거 뒤 병원에 입원한 아바스칼은 26일 세입자 연합을 통해 "내게 일어난 일이 다른 사람들에겐 일어나지 않도록 이 일이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자신의 사례가 관련 법 개정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취지다.
세입자 연합은 소셜미디어에서 "더는 견딜 수 없다. 임대 시스템이 무너지든 정부가 무너지든 둘 중 하나"라며 시민들에게 시위 참여를 호소했다.
26일 시위 현장에서는 주택 시장이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성토가 잇따랐다.
38세 그래픽 디자이너 엔리케 오르테가 데 미겔은 AFP에 "감당할 수 있는 집을 찾는 것 자체가 고생인데, 그마저도 쫓겨날까 봐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로 2024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도 광장을 찾았다.
그는 스페인 공영방송 RTVE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은 마지막 방아쇠였다"며 스페인의 현재 주택 상황이 "절대적으로 견딜 수 없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스페인 주요 도시에서는 만성적인 공급 부족에 관광 산업 확대에 따른 단기 임대 전환, 인구 유입, 외국인 투기가 겹치면서 집값이 크게 올랐다. 마드리드 부동산 업체 '이데알리스타'는 지난 10년간 월세가 거의 두 배로 뛴 것으로 추산한다. 스페인청년협의회(CJE)는 청년 노동자가 월급의 98.7%를 주거비로 써야 하는 실정이라고 비판했다.
주택 문제는 내년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도 뜨거운 쟁점이다.
사회당 소속인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27일 사회당 집회에서 아바스칼의 사례를 언급하며 "정부는 주택 관련 법안을 마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체스 총리가 거론한 법안에는 임대차 계약 자동 갱신과 퇴거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 등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사회당이 의회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 법안 통과는 불투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