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강세 등의 영향으로 수입물가가 석 달 연속 하락했지만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먹거리 물가 부담은 여전하다. 라면부터 즉석밥, 빵, 음료까지 주요 식품기업들이 잇따라 제품 가격을 올린 데 따른 것이다.
정부와 식품업계는 대규모 할인행사로 장바구니 부담 낮추기에 나섰지만, 판매가격은 오른 상태에서 한시적인 할인행사를 반복하는 방식이 장기적인 물가 안정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정상가격'에 대한 의문이 커질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석달 연속 하락한 수입물가…그래도 식품값은 올랐다
19일 한국은행과 식품업계에 따르면 지난 8월 수입물가지수는 전월보다 2.4% 하락했다. 지난 6월 4.2% 하락한 데 이어 7월 1.0%, 8월 2.4% 떨어지며 석 달 연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8월 월평균 두바이유 가격이 전월보다 상승했지만, 원·달러 평균 환율이 하락하면서 수입물가를 끌어내렸다.
문제는 소비자가 체감하는 식품 가격은 여전히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다.
실제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3.1% 상승했다. 이 가운데 농축수산물 가격은 2.6% 하락했는데, 특히 신선채소는 9.8%, 신선과실은 10.0% 떨어졌다. 반면 반면 가공식품 가격은 1년 전보다 1.5% 올랐다. 농축산물 가격이 안정되고 수입물가도 하락했지만, 가공식품에선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배경엔 국내 식품기업들의 도미노 가격 인상이 자리잡고 있다. 실제 농심은 지난달부터 용기면과 스낵, 음료 등 43개 브랜드의 출고가격을 평균 5.8% 인상했고, CJ제일제당 역시 햇반과 만두, 생선구이 등 27개 품목의 가격을 평균 8% 올렸다.
오뚜기도 지난 7월 카레와 당면, 케첩, 후추 등 29개 품목의 출고가격을 조정했는데, 제품군별 평균 인상률은 후추류가 17.0%, 당면류 10.0%, 카레와 케첩류가 각각 6.1%에 달했다. CJ푸드빌이 운영하는 뚜레쥬르는 빵과 케이크 등 76개 품목 가격을 평균 8.2% 인상했고, 던킨도 도넛 39종의 가격을 평균 6.5% 올렸다.
소비자들이 자주 구매하는 가공식품 가격이 잇따라 오르면서 전체 소비자물가와 실제 장바구니에서 느끼는 물가 사이의 괴리도 커지고 있는 것이다.
▲"원가 상승 압박 여전"…식품업계, 가격 인하 '난색'
식품업계는 수입물가 하락이 곧바로 제품 가격 인하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원재료를 실제 제품에 투입하기까지 수개월의 시차가 있는 데다 국제 원재료 가격 외에도 포장재와 물류비, 인건비, 에너지 비용 등 다양한 원가가 제품 가격에 반영된다는 이유에서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환율 하락으로 수입 원재료비용 부담이 덜하긴 하지만 개별 원부자재로 볼 때 알루미늄캔, 플라스틱 페트, 과일 및 커피 농축액 등 가격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며 "물류비, 인건비, 각종 유틸리티비도 계속 우상향중"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수입물가 역시 전월 대비로는 하락했지만 지난해와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인 만큼 원가 부담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식품업계 관계자도 "수입물가지수가 떨어졌지만 직접 사용하고 영향 받는 품목 가격은 동향 살펴봐야 하는 상황"이라며 "종합적으로 봤을 때 현재 가격 조정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할인할 여력은 있으면서 가격 인하는 없다?"
문제는 가격 인하에 미온적인 입장인 식품업계가 가격 인상 직후 정부 주도의 대규모 할인행사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지난 5월 농림축산식품부는 식품기업 16개사와 함께 가공식품 4,373개 품목을 최대 58% 할인했다. 라면 154종은 최대 36%, 빵 72종은 최대 37%, 과자·스낵·시리얼 440종은 최대 50% 할인됐다. 가격 인상이 본격화한 8월에는 할인 규모가 더욱 확대됐다. 농식품부와 농심·CJ제일제당·오뚜기·롯데칠성음료·빙그레 등 주요 식품기업 10개사는 대형마트·편의점·이커머스에서 3,838개 품목을 최대 57% 할인했다.
추석을 앞두고 할인 규모는 더 커졌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현재 식품기업 20개사가 27개 부류, 4,765개 품목을 할인 판매하고 있다. 최대 할인율은 64%에 달한다. 이 가운데 라면은 일부 제품이 최대 50%, 식용유는 20~50%, 일부 음료는 온라인에서 최대 64%, 아이스크림·빙과류는 최대 50% 할인된다.
원가 상승을 이유로 가격을 올린 기업들이 동시에 수백에서 수천개의 제품을 큰 폭으로 할인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특히 원가 상승시 출고가격을 5~10%씩 올리면서도 정부의 물가 안정 요청이 나오면 수천개 제품을 30~60%씩 할인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정상가격'에 대한 의문이 커지는 배경이다. 가격을 내릴 여력은 없지만 할인할 여력은 있다는 설명만으로 소비자를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정환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원가 상승기에는 가격을 빠르게 올리고 하락기에는 인하가 더딘 '가격의 하방경직성'도 존재한다"면서도 "이런 현상이 장기화된다면 원가 하락분이 소비자보다 기업의 마진 개선에 더 많이 반영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