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이 없는 투자처로 불리던 미국 달러 기반 자산들에 잇따라 균열이 커지고 있다. 전 세계 자산 가격의 기준점이 되어온 미국 10년 만기 국채금리가 연 5% 선을 넘나들며 각종 투자자산들이 랠리를 멈추고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미국과 이란이 진행 중인 중동 전쟁 격화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선을 다시 넘어선데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기준금리 결정이 임박한 여파다. 장기 금리를 끌어내리기 위해 이례적인 시장 개입에 나섰던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15일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증언대에 앉아, 자신의 국채 바이백(재매입) 덕분에 금리 충격이 이 정도에 그쳤다며 방어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의회예산국(CBO)은 지난 2월 시작한 미국의 이란 공습 작전 비용이 381억 달러(약 52조 7천억원, 달러당 1,371원 기준)에 달한다는 추계를 내놓으며 재정적자발 미 국채 매도 압력을 키우는 양상이다.
노무라 증권은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붐에 가려져 있던 미국 쌍둥이 적자와 리스크 프리미엄의 민낯을 드러냈다는 평가까지 내놓는 등 종전 희망이 옅어진 이란 전쟁과 천문학적인 전쟁 청구서로 인해 투자자들의 미국을 이탈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우려도 이어지고 있다.
매크로 이슈를 깊이 따져보는 [딥씨], 오늘 순서는 막대한 전쟁 자금이 불러온 나비 효과, 미국이 왜 장기 국채금리 인하에 혈안이 되었는지를 들여다 봤다.
● 재정적자 불쏘시개 된 이란 전쟁..CBO "저강도 충돌에도 매달 20억 달러 소진"
미국의 장기 지불 능력에 대한 의심은 미 의회예산국, CBO가 브렌던 보일 하원 예산위 민주당 간사에게 보낸 서한으로 인해 다시 번지고 있다.
CBO가 공개한 서한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2월 28일 '에픽 퓨리 작전(Operation Epic Fury)'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대이란 전쟁은 8월 1일 기준 국방부에 약 381억 달러의 청구서를 안겨줬다.
미국은 이란의 핵 무장 능력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초기 대규모 항공·해군 전력을 투입한 데 이어 장기전으로 운용·보충 비용을 소진해왔다.
미 국방부가 약 반 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소모한 패트리어트 등 미사일과 탄약을 다시 채우는 데 필요한 예산만 217억 달러 규모에 달한다.
CBO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충돌이 지금 같은 저강도로 이어져도 매달 20억 달러, 지난 7월 수준으로 격화되면 매달 30억 달러가 추가된다고 봤다.
이번 자료는 미 국방부가 CBO의 공식 요청에 응하지 않아 정부 데이터베이스와 공개 자료에 의존해 만든 잠정치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은 지난해 6월 이스라엘·이란 간 전쟁과 이번 작전을 거치며 미사일방어 요격탄의 절반에서 약 60% 이상 소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발에 약 400만 달러, 우리 돈 55억 원 수준인 패트리어트·SM-6를 비롯해 사드, 최신형 SM-3 등고가 무기들은 당장 발주해도 재고 복원에 최소 5년이 걸린다는 것이 CBO의 계산이다.
● 미국, 국채 이자만 1조 달러…막대 비용을 어찌 감당하나
이란 전쟁의 막대한 비용은 미국이 갚아야할 이자 비용 줄이기에 왜 혈안인지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이번 전쟁 비용 추계에 앞서 CBO가 지난 9일 발표한 월간 재정 리뷰에 따르면 2026회계연도 11개월(2025년 10월~2026년 8월) 누적 재정적자는 1조9,670억 달러, 약 2조 달러(약 2,742조 원)에 달한다.
명목상으로는 전년 동기보다 60억 달러 줄었지만, 지급 시기 조정 효과를 걷어내면 오히려 820억 달러 늘었다.
가장 심각한 항목은 국채 순이자 지급액인데, 1조 520억 달러로 전년보다 12% 급증하며 처음으로 1조 달러를 돌파했다.
이는 현재 8,330억 달러인 국방비를 넘어선 규모다. 장기금리를 내려 이자 비용을 줄이더라도 막대한 미사일과 전략 무기 재고 확보로 인해 재정 적자를 완화시킬 뾰족한 방안이 보이지 않는 구조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 정책이 이어지고, 이를 대체하려던 관세는 연방대법원이 지난 2월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 적용에 제동을 걸면서 1,100억달러 규모의 환급이 이뤄져 제자리걸음이다.
● '하우스 온 파이어'…5% 돌파에 자존심 구겨진 베선트
이러한 상황에서 거대한 미국의 재정적자를 누르고 살림을 꾸려나가려던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요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가파른 국채금리 상승이 그에게 유독 뼈아픈 것은 스스로 엔화 투자자들을 향해 꺼냈던 "내가 하우스(the House·카지노의 딜러 측)다. 하우스에 맞서 베팅하지 말라"던 경고 탓이다.
리서치업체 글로벌데이터 TS롬바드의 다리오 퍼킨스 이코노미스트는 14일 보고서에서 "베선트는 하우스가 아니다. 하우스는 연준(Fed)"라며 "그는 기껏해야 손님이 도박을 계속하도록 공짜 술을 따라주는 카지노 종업원일뿐"이라고 조롱했다.
채권시장의 이러한 냉소는 몇달째 누적되어온 미 재무부와 시장의 심리전 영향이 크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채권시장이 스콧 베선트가 꺼낸 회당 60억 달러 규모의 장기 국채 바이백에 시큰둥했던 이유를 채권 투자자 특유의 심리라고 분석했다.
금리를 인위적으로 누르려는 재무부의 개입은 채권 시장 투자자들이 가진 우월감을 건드렸다는 진단까지 나왔다. 미국의 경제 성장률 3%, 재정적자 GDP의 3%, 하루 300만 배럴 증산을 내걸고 등장했던 베선트 장관이 정작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발언과 전쟁에 묻여 시장의 신뢰만 잃었다는 설명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을 통해 재무부의 시장 개입에 비판적 글을 남겼던 드러켄밀러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도 "경제상황과 자본을 둘러싼 쟁탈전을 감안하면 오히려 지금의 국채 금리는 다소 낮은 수준"이라며 "금리는 펀더멘털에 이끌려 완만한 상승을 이어왔을 뿐 전혀 우려할 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미 재무부의 바이백 확대 이후 장기금리 상승이 이어지자 미 의회의 추궁도 이어졌다. 하루 전인 15일 미 의회 청문회에 나선 베선트 장관은 시장 개입이 실패한 것 아니냐는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역대 가장 성공한 국채 입찰을 두 차례 치렀다"며 시장 개입으로 발행 금리를 더 낮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선트 장관은 이날 청문회에서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이기면 미국인들에게 5,000달러(약 700만원)를 지급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이 이미 검토 중이었다고 밝히는 등 나라빚 해소 우려를 덜어내는데는 실패했다.
● AI붐 마법의 열쇠될까..노무라 '리스크 프리미엄 벗겨질 수도'
그럼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는 장기 금리, 쌓여가는 적자.. 반복되는 위기론 속에도 미국 자산이 버틴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일부 해답이 될만한 보고서가 이달 초 공개됐다.
노무라증권의 글로벌경제팀은 이달 발간한 보고서에서 AI인프라 투자 붐이 일시적으로 미국의 증가하는 위험 프리미엄을 가려왔다는 분석을 내놨다.
롭 수브라만 수석 이코노미스트팀은 미국의 재정과 통상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도가 눈에 띄게 하락했음에도 달러자산이 견고한 것은 오픈AI, 엔비디아 등 AI 관련 인프라에 대한 막대한 투자 때문이라고 밝혔다.
미국 주식시장이 올해 상반기까지 랠리를 이어가면서 외국인이 보유한 미국 자산의 평가액 자체가 커졌고, 고질적인 취약점인 쌍둥이 적자, 즉 재정적자와 경상적자의 심각성을 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려져있는 미국의 위험 규모는 결코 작지 않다. 미국의 대외 순부채(순국제투자포지션·NIIP 기준)는 2025년 21조 9천억 달러, 약 3경 원 규모로 국내총생산(GDP)의 71%에 달한다.
노무라가 해외에 순자산을 굴리는 전 세계 88개 순채권국의 자산을 모두 더해 비교했더니, 미국의 순부채는 그 합계의 80%에 달했다. 전 세계가 나라 밖에서 굴리는 순저축의 8할이 사실상 미국 한 곳에 잠겨 있다는 뜻이다.
미국은 이처럼 해외투자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막대한 자산을 보관하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 덕에 해외 투자 수익률을 높게 유지해가며 20년 이상 적자를 덮어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완만한 속도로 장기 금리가 뛰고 이자 지급액이 눈덩이로 불어나면서 배당과 이익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가 굳어졌는 것이 노무라팀의 진단이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조사에 따르면 미국과 해외 금리가 1%포인트 오를 때마다 미국의 순본원소득은 1,500억 달러씩 깎여 나가는 규모로 추산된다.
그럼에도 시장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결국 달러화가 강한 힘을 되찾은 것처럼 이른바 '대안없음(There Is No Alternative·TINA)'라는 통념에 따라 움직여왔다. 적어도 지난해까지는 말이다.
혼란스러운 미 채권 시장과 AI붐의 지속성을 가늠할 시험대는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연준은 16일(현지시간, 한국시간 17일 새벽 3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성명서를 공개한다.
물가가 5년 연속 연준의 목표를 웃도는 가운데 전쟁발 에너지 인플레이션까지 겹치면서, 시장이 연내 2차례 금리인상 가능성까지 대비하는 가운데 케빈 워시 연준 의장이 꺼낼 신호에 전세계 투자자들의 운명이 갈릴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