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까지 자본 시장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기업은 주식을 발행해 주주를 모으거나, 채권을 팔아 자금을 빌렸습니다. 투자자는 증권사 계좌에서 주식·채권·펀드를 고르면 됐습니다. 기업과 금융회사, 당국, 투자자가 대체로 같은 언어로 시장을 이해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투자 대상은 기업 지분을 넘어 부동산 임대 수익, 음악 저작권, 영화·드라마 IP, 인프라 사업의 수익권, 탄소배출권 등으로 넓어졌습니다. 한 회사 전체가 아니라 ‘하나의 건물’, ‘한 편의 콘텐츠’, ‘특정 프로젝트에서 나오는 수익’을 나눠 투자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기업과 프로젝트의 자금 조달 방식도 다층화되고 있습니다. IPO와 회사채 발행 뿐 아니라 사모펀드, 프로젝트파이낸싱(PF), 구조화증권, 크라우드펀딩, 조각투자 플랫폼이 함께 작동합니다. 이제 자본시장의 경쟁력은 실물 경제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권리와 수익, 위험을 얼마나 정교하게 담아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디지털 전환이 만든 ‘조각’의 시대
변화의 동력은 디지털 전환입니다. 금융 거래가 종이 장부에서 전산 시스템으로 옮겨간 데 이어, 이제는 소유권·수익권 같은 권리 자체를 디지털 데이터로 표현하고 관리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바일 앱에서 부동산이나 미술품, 음원 수익권의 일부를 사는 조각투자가 대표적입니다. 과거에도 여러 사람이 건물이나 콘텐츠 수익을 나눠 갖는 구조는 있었습니다. 다만 복잡한 계약과 신탁, 비공개 사모 방식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일반 투자자가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디지털 플랫폼은 이 문턱을 낮췄습니다. 투자자는 적은 금액으로도 과거에는 큰 자본이 있어야 접근할 수 있었던 자산에 참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자본시장의 단위도 ‘한 주, 한 채, 한 건’에서 ‘한 조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편리함만큼 질문도 커졌습니다. 내가 산 조각은 정확히 어떤 권리인지, 문제가 생기면 어느 법과 규제에 따라 보호 받는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수익을 나누는 상품이라도 어떤 것은 증권 규제를 받고, 어떤 것은 현물 거래나 권리 양도라는 이름으로 규제 밖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토큰에 증권 규율을 입히면 '토큰증권'
가상자산 시장은 토큰 기술의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보여줬습니다. 블록체인과 토큰은 거래 기록, 권리 이전, 수익 분배를 효율화 할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정보 공개와 투자자 보호 장치 없이 발행된 수많은 코인과 토큰은 투기, 사기, 해킹, 가격 급변이라는 부작용도 낳았습니다.
여기서 등장한 해법이 토큰증권입니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토큰이라는 디지털 형식은 활용하되, 증권으로서의 규율을 적용하자는 것입니다. 부동산·IP·기업 지분 등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받을 권리를 디지털 토큰으로 기록하고 이전하되, 발행·공시·유통·투자자 보호에는 금융 규제를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를 발행하는 행위를 토큰증권 발행, 즉 STO(Security Token Offering)라고 합니다. 토큰증권은 가상자산을 그대로 제도권에 들이는 방식이 아닙니다. 블록체인의 효율성과 자본시장의 신뢰·보호 체계를 결합하려는 실험에 가깝습니다.
성공한다면 투자자는 더 다양한 자산에 접근할 수 있고, 기업과 프로젝트는 새로운 자금조달 통로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거래가 충분히 활성화되지 않거나 기초자산 가치 평가와 수익 배분이 불투명하다면, 새로운 형태의 불신과 투기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토큰증권은 단순히 새로운 투자 상품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증권은 무엇인지, 소유권과 수익권을 어떻게 기록하고 이전할지, 금융회사·거래소·예탁결제기관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 지를 다시 묻는 변화입니다.
주식·채권·펀드의 시대를 지나 자본 시장은 이제, ‘권리를 어떻게 쪼개고 신뢰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기존 주식과 채권처럼 표준화된 정형자산까지 토큰화하겠다는 금융당국 역시, 이 변화가 시장의 효율성과 투자자 보호를 함께 달성할 수 있는지 검증해야 하는 시험대에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