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국 통화가치가 금리 차보다 재정 건전도가 더 큰 역할을 차지하면 정반대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종전에는 금리가 올라가면 자금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수요가 증대되는 해당국 통화가치가 올라간다고 봤다. 하지만 국가채무가 위험수위를 넘은 국가는 금리가 상승하는 것이 부도 위험을 높여 해당국 통화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재정정책은 성장률(g)가 이자율(r)보다 높으면 빚내서 더 써도 좋다는 현대통화이론을 토대로 추진해 왔다. 재정지출에 따라 성장률이 제고될 때까지 금리는 낮춰져야 한다는 단서도 달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준금리를 1% 밑으로 인하해야 한다는 요구했던 것도 이 이론에서 근거에서다.
문제는 국가채무가 위험수위를 넘은 재정지출에 따라 성장률을 제고시키기보다 훼손시킨다는 점이다. 디폴트 우려로 매력이 떨어진 국채를 무리하게 소화하는 과정에서 국채금리가 더 올라 민간 수요가 위축되는 구축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금리인하와 재정지출 증가로 물가까지 더 끌어올리는 ‘재정 긴축(fiscal stagnation)’이 발생한다.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국채금리가 올라가는 속에 달러 가치가 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초 4% 선에서 안정적으로 움직이던 10년 국채금리는 4.7% 내외까지 상승했다. 같은 기간 중 달러인덱스는 112에서 98선까지 10년 국채금리 상승 폭보다 더 떨어져 미국 주식과 달러 투자자를 당혹스럽게 했다.
일본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3년 전 취임한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는 엔저를 엔고로 돌리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려왔다. 우려대로 국채금리를 기준금리 인상 폭보다 더 상승시키는 수수께끼 현상이 발생했다. 국가 채무 비율이 250% 넘는 여건에서는 기준금리 인상이 부도 위험을 높여 국채 투자 매력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엔화 가치도 떨어졌다. 우에다 총재 취임 직전 130엔대 초반에서 머물렀던 엔·달러 환율이 최근에는 미국괴의 공조 개입 노력에도 160엔 내외까지 상승했다. 오히려 미국보다 더 심각한 구축 효과가 나타나 성장률이 정체된 반면 엔저와 재정지출로 물가가 오르는 재정 긴축이 나타나고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앞으로 개선 가능성도 적다는 점이다. 미국과 일본 정부가 재정정책의 근간인 현대통화이론대로라면 지금은 재정 건전화(FC·fiscal consolidation)를 도모해야 한다. FC는 단순히 긴축(austerity)이 아니라 공공기관과 공무원 수 대폭 축소, 각종 위원회 폐지 등을 통해 재정수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방안을 말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다카이치 총리가 선택할 것인가. 그 답은 ‘절대 아니다(absolutely no)’다.
반면에 재정적자를 GDP대비 3% 이내로 관리해야 한다는 경제 수렴 조건이 재정 준칙 역할을 하고 있는 유로랜드는 상황이 다르다. 독립성 훼손에서 자유로운 유럽중앙은행(ECB)까지 선제적으로 금리를 올려 물가가 목표선에 가장 근접시켰다. 회원국별로 정치적 혼란, 이민, 이상 기후 등으로 성장률은 높지 않지만 유로화 가치가 강세를 띠는 것이 이 때문이다.
미·일 간 환시 개입이 쉽게 무너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통화가치 결정에 재정의 역할이 중시되는 때에 당사국이 가장 취약하기 때문이다. 조만간 엔·달러 환율이 160엔대로 진입하면 이번 공조 개입을 주도한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수모를 당할 것이라는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공조 개입 설계도 잘못됐다. 베센트 장관은 자국의 국채 파동을 막기 위해 일본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담보로 달러를 공여하는 해외 국제통화당국(FIMA) 환매조건부 채권(레포·Repo)을 활용했다. 하지만 FIMA는 담보만큼 달러가 풀려 약세가 되는 한계를 갖고 있어 궁여지책 속에 유로 매도 개입을 선택했다.
문제는 유로 매도 개입은 유럽 연합(EU)의 통상 위협 대응 조치(ACI)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ACI는 특정 회원국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위협을 받으면 EU 전체 차원에서 보복할 수 있는 규정을 말한다. 기본 원칙은 게르만식 팃 포 탯(Tit for Tat)으로 하나 받으면 하나 주는 함무라비 법전식 대응이다.
미국의 부당한 유로 매도 개입에 ACI 대응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유럽 내 미국의 무역과 투자를 제한하고, 다른 하나는 금융서비스 활용과 공공 조달 시장 참여를 배제한 것이 주 내용이다. 필요하면 미국 내 보관하고 있는 금 뿐만 아니라 투자한 자산까지 회수할 수 있다는 강력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
ACI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관세를 집중적으로 부과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2차 대전 이후 유럽 원조 계획인 마셜 플랜의 일환으로 미국 내 보관해 뒀던 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졌다. 예상대로 트럼프 정부의 강한 반발 속에 EU에 큰 부담이 됐던 상호관세는 결국 미국 대법원의 위법 판결로 철회됐다.
유로 매도 개입에 ACI식 대응이 지속되면 미국이 국채 파동을 겪을 확률이 일본이 미국 국채를 매각할 때보다 훨씬 더 높다. 유럽 전체적으로 미국 국채 보유액은 2조 달러가 넘어 일본의 1조 1000억 달러에 비해 2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유럽은 미국 주식도 6조 달러, 미국 회사채도 2조 달러 이상 갖고 있다.
유럽의 ACI식 대응에 베센트 장관이 가져갈 수 있는 시나리오는 세 가지다. 최선책은 지금이라도 유로 매도 개입을 철회하는 경우다. 차선책으로 국제금융시장 안정을 목적으로 유럽의 협조를 구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로 매도 개입을 밀고 나가는 최악의 방안을 선택하면 세계 경제에 커다란 후폭풍이 예상된다.
베센트 장관은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지난해 중국의 희토류 등 회귀 광물 수출 통제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적 강압까지 고려했던 트럼프 정부에 ACI 규정에 따라 유럽 전체 반발로 지켜낼 수 있었던 덴마크 모델로 갈 확률이 높다. 오히려 국제적으로 그린란드가 덴마크령임을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지난 2월 말 이후 이란 전쟁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상대방의 강한 저항으로 더 이상 대응 수단이 없는 ‘노 윈(No Win)’ 딜레마에 빠질 때 트럼프 정부가 취하는 방식이 타코(TACO)다. 상대방을 죽일 듯했던 닭싸움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 할 정도로 흐지부지된다. 유로화 가치가 10일 만에 개입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자 아무런 조치가 내놓지 않고 있다.
미·일 간 공조 개입 실패로 베센트 장관이 대안으로 들고 나온 것이 바이백(buy back)이다. 성공할 수 있나? 국채 파동을 막을 수 있을 유일한 방안은 국가채무를 줄이는 길이다. 미국의 국가채무는 40조 달러(5경 6000조원)까지 불어난 상황이다. 이젠 성장률(g)이 이자율(r)보다 낮아졌는데도 빚내서 더 쓰자는 식으로 재정을 운영하는데 바이백도 성공할 수 없다.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도 많다. 재정이 통화가치 결정을 좌우하는 여건에서는 금리 인상이 원·달러 환율을 안정시키는 효과는 종전만 못하다. 국가채무비율로 볼 때 재정 건전국이지만 국가채무 증가 속도는 가장 빠르다.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국가채무가 티핑 포인트를 넘어섰을 때는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상황만 더 악화시킨다. 재정 준칙만큼은 도입해야 할 때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