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주식 시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거대한 AI 경쟁의 중간 결말이 도출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동안은 AI 기업들이 AI에 돈을 많이 쓴다고 발표할 때마다 주가가 오르는 '투자 만능주의' 공식이 지배했습니다. 대표 수혜주는 반도체 기업이었죠. 이제 시장은 돈을 얼마나 많이 쓰느냐가 아니라, 돈을 어떻게 벌어들여 수익으로 연결하느냐를 따지고 있습니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AI 경쟁에서 뒤처져도 폭락하고, 남의 돈을 빌려 무리하게 앞서가도 폭락하는 위험한 구간이 시작됐다"고 진단했습니다.
전병서 소장은 ▷칭화대 석사·푸단대 박사 ▷대우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반도체IT 애널리스트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겸임교수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
● IBM과 오라클에 날아든 청구서
14일(현지시간) 미국에서는 2장의 냉혹한 청구서가 날아들었습니다.
먼저 IBM은 'AI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큰 출혈을 경험했습니다. IBM은 2분기 매출 전망치를 월가 전문가들의 기대치인 178억 달러에서 172억 달러로 낮춰 잡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주가는 하루 만에 25.21%나 폭락했습니다. 이는 IBM이 58년 만에 기록한 최악의 낙폭입니다. 씨티그룹은 IBM을 향해 "AI 전쟁의 패배자"라는 뼈아픈 평가를 내렸습니다.
반면 오라클은 정반대의 이유로 철퇴를 맞았습니다. 오라클은 AI 시장의 패권을 잡기 위해 오픈AI와 3000억 달러 규모의 초대형 계약을 맺고,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짓는데만 557억 달러를 쏟아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문제는 이 자본을 자기 돈이 아닌 빌린 돈(회사채)으로 메웠다는 점입니다. 무리한 빚으로 재무 상태가 불안해지자 글로벌 신용평가사는 오라클의 신용등급을 투기 등급 직전의 'BBB-'까지 강등했습니다. 주가는 14개월 만의 최저치인 주당 133달러로 곤두박질쳤습니다.
● '투자'에서 '수익화'로 바뀐 시장 논리
지난 2년간 시장은 단순한 공식에 지배돼 왔습니다. 기업이 AI에 투자하는 돈, 자본지출(CapEx)을 늘리겠다고 선언하면 주가는 올랐습니다. 메타가 설비투자를 높이면 환호성이 터졌고, 마이크로소프트가 클라우드 서비스(애저)의 AI 수요를 확인해주면 반도체 주가가 일제히 뛰었습니다.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선언은 반도체를 사겠다는 주문서나 다름없었죠.
하지만 전병서 소장은 이번 IBM과 오라클의 충격이 이 공식에 균열이 생겼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분석합니다. 시장은 '두 가지 위험 요소'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 첫 번째는 '예산 이탈' 현상입니다. 기업들이 한정된 예산 안에서 AI 데이터센터를 짓고 AI 서버를 도입하는 데 돈을 몰아주다 보니, 기존 소프트웨어 등 전통 사업에 쓰던 예산을 급격히 삭감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IBM이 폭락한 핵심 원인도 바로 고객사들의 예산이 AI 인프라로 쏠리면서 기존 소프트웨어 매출이 구조적으로 훼손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 두 번째는 '자금 조달 위험성'입니다. 이제는 얼마나 투자하느냐보다 어떤 자금으로 투자하느냐가 훨씬 중요해졌다는 얘기입니다. 빚에 의존해 투자를 확장하면, 기업이 벌어들인 돈에서 이자와 세금 등을 빼고 남은 순수한 여유 현금인 '잉여현금흐름(FCF)'이 심각한 압박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글로벌 거대 기술 기업들의 투자 계획을 보면 현금흐름 경고등이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은 2026년에 1750억~1850억 달러를 투자할 전망이지만, 1분기 기준 잉여현금흐름은 전년 대비 46.6% 급감했습니다. 이를 메우기 위해 채권 발행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아마존 역시 전년보다 2배 늘어난 2000억 달러의 설비투자 예산을 잡고 있지만 여유 현금이 크게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 "빅테크 투자=반도체 호재" 공식의 위험성
이러한 변화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반도체 투자자들이 믿어온 공식에도 강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지금까지는 '빅테크 기업들이 AI 투자를 지속하는 한, HBM와 D램 수요는 꺾이지 않는다'는 굳건한 믿음이 존재했습니다.
전병서 소장은 이 논리에 숨겨진 빈틈을 지적합니다. 앞서 설명한 예산 이탈 현상에서 알 수 있듯 기업들의 예산이 AI 하드웨어 인프라로 쏠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IT 예산의 총량 자체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소프트웨어에 쓸 돈을 아껴서 반도체를 사는 것일 뿐이므로 착시 효과를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오라클처럼 빚을 내서 투자하다가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면, 결국 빅테크 기업들도 대규모 데이터센터 발주 자체를 줄일 수밖에 없는 리스크가 생깁니다.
더 큰 문제는 수급에 있습니다. 최근 빅테크와 반도체 주가가 크게 오르면서 상당수 글로벌 주식 펀드들은 이들 종목을 시장 기준치보다 훨씬 많이 담고 있는 '오버웨이트(비중 초과)' 상태라는 겁니다. 반도체와 테크 주식을 바구니에 가득 담고 있다 보니 좋은 실적이 나와도 주가가 더 오르기는 어렵고 반대로 실적이 조금만 기대에 못 미쳐도 실망 매물이 폭탄처럼 쏟아질 수 있는 '비대칭적 위험 구간'이 만들어졌다는게 전 소장의 분석입니다.
● 앞으로 2주, 반도체주 분수령
국내 증시에서도 경고등은 이미 켜졌습니다. 지난 7월 1일부터 최근까지 삼성전자는 14.79%, SK하이닉스는 21.8% 하락하면서 본격적인 조정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이번달 말까지 국내 메모리 반도체 주가의 방향성을 결정지을 핵심 이벤트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의 2분기 실적이 발표됐습니다. TSMC는 2분기 순이익이 7066억 대만달러로 1년 전보다 77% 늘었다고 밝혔습니다. 시장 전망치(6326억 대만달러)를 크게 웃도는 수준입니다. 반도체 수요가 탄탄하다는 것이 일단 입증이 되긴 했습니다.
29일(한국시간)에는 SK하이닉스의 2분기 실적 발표가 예정돼 있습니다. 전체 매출 중 HBM이 차지하는 비중과 3분기 실적 전망치가 최대 변수로 작용할 전망입니다. 특히 마이크론처럼 3~5년 단위 초장기 계약(SCA)이 발표될 경우 반도체 사이클 둔화에 대한 우려감을 지울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시간 22일에는 구글 알파벳, 29일은 MS와 메타, 30일은 아마존의 실적이 연이어 발표될 예정입니다. 이들의 향후 투자 계획과 현금 흐름이 반도체 섹터의 방향을 결정짓게 될 전망입니다. 또 30일에는 미국 기준금리 결정, 국내총생산, 개인소비지출 물가지표 발표가 한꺼번에 몰린 '슈퍼 이벤트 데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벤트를 겪는 과정에서 투자자들도 현명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빅테크 기업들의 실적 발표가 나온 뒤 그들이 제시하는 투자금 계획에서 자기 돈과 빌린 돈의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자금 조달 구조를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기업의 여유 현금이 나빠지고 있는데도 무리하게 투자를 유지한다고 하면 이는 '경고 신호'로 읽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