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닥 첫날 17% 뛴 SK하이닉스…최태원 "미국 팹, 조건 맞으면 짓는다”

입력 2026-07-11 03:53
수정 2026-07-11 04:13


(뉴욕 = 김종학 특파원) 세계 최대 HBM(고대역폭메모리) 업체인 SK하이닉스가 10일(현지시간) 오전 9시 30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나스닥 마켓사이트에 데뷔했다.

이날 오전 9시 30분 오프닝벨에 맞춰 뉴욕 타임스스퀘어 일대의 대형 전광판들이 일제히 연보랏빛의 SK하이닉스 상장을 기념한 영상들로 바뀌었다.

나스닥 마켓사이트에 예탁증서(ADR)를 통해 상장한 SK하이닉스는 공모 가격 주당 149달러에 조달액 265억 달러를 확정하며, 미국에 상장한 외국기업 가운데 사상 최대 기록을 세웠다.

앞선 최대 기록인 중국 알리바바 ADR 상장 당시 250억 달러를 뛰어넘은 기록이자, 올해 미국 상장 기업 중 스페이스X 뒤를 잇는 규모의 기업 공개다.

나스닥 오프닝벨 행사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수석부회장, 곽노정 SK하이닉스 CEO를 비롯해 재무 담당 임원 등 주요 경영진들이 총출동했다.





◆ "파산 직전까지 갔던 회사"…25년의 반전 드라마

뉴욕 증시 개장 10분여를 앞두고 기념사에 나선 곽노정 CEO는 “믿어준 투자자와 고객들에게 감사하다”며 “전 세계 4만 8천 명의 임직원에게도 여기까지 이끌어줘서 고맙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25년 전 D램 침체로 인한 위기 속에서 2001년 채권단 관리로 내몰렸던 옛 하이닉스반도체가 2012년 SK그룹에 인수되며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위기 속에서 회사가 베팅한 것이 시장성조차 불투명했던 HBM(고대역폭메모리)이다.

곽 CEO는 “미래가 불확실하던 시절 HBM에 투자해 세계 최초로 현실로 만들었고, 오늘날 HBM은 AI 혁명의 심장에 서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분기 기준 SK하이닉스의 HBM 세계 시장 점유율은 약 58%로 삼성전자·마이크론(각 21% 안팎)을 합친 것보다 크고, 1분기 영업이익률 72%를 기록한 발판이 됐다.

SK하이닉스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달 컴퓨텍스2026 당시 전시 부스를 찾아 HBM4E 웨이퍼에 "더 많이 만들어 달라(Please Make More)”라고 적을 만큼 각별한 파트너사 자리를 지키고 있다.

SK하이닉스 ADR은 임시 티커인 SKHYV로 오전 11시 25분경 첫 거래를 시작해 시초가는 공모가보다 14% 높은 170달러, 정오 무렵엔 17% 뛴 175달러선에 오르는 등 시장의 강한 수요를 재확인했다.

이날 뉴욕 특파원단과 간담회를 갖던 중 시초가를 확인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이 가격이 유지될지는 알 수 없다. 사업 성과를 내는 것이 근본”이라며 말을 아꼈다.



◆ “수요 기하급수적 증가…팹 충분히 더 지어야"

SK하이닉스의 이번 공모 자금 상당 비중은 국내 생산 능력 확충과 극자외선(EUV) 장비 구매 등에 사용할 예정이다. 다만 최태원 회장은 향후 국내 뿐 아니라 미국 내 추가 투자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최 회장은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미 행정부의 투자 요구 여부에 "직접 요청을 받은 적은 없지만, 공식이냐 아니냐는 의미가 없다"며 "메모리 팹은 대규모 전력과 용수, 부지가 필요한데 조건에 맞는 곳이라면 미국이든 어디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우리는 팔기만 하고 제조는 안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전날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마이크론의 뉴욕 신규 팹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향해 미국 내 공장 건설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다만 최 회장은 “한국에 최대한 투자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란다”며 “한국 팹을 덜 짓고 미국으로 옮기는 것 아니냐 하는데 이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최 회장은 “마이크론도 미국에 시설이 거의 없었다”면서 경쟁 기업을 포함해 현재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상당한 공급 능력 확보 압력에 놓여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CNBC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5년내 생산능력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발표에 “고객들이 여전히 충분하지 않아 하고, (공급을) 더 필요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달 들어 심화한 AI 하이퍼스케일러들의 투자 약화 우려와 메모리 반도체 고점 우려에 대해서도 최 회장은 “옛날과 같은 사이클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확실해졌다”며 시장이 구조적으로 바뀌었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과거 메모리 수요는 사람과 기기 숫자에 묶였지만, AI 시대엔 토큰 사용량이 늘수록 저장해야 할 KV캐시(데이터)가 늘고 그것이 곧 메모리 수요"라고 설명했다.

KV캐시는 챗GPT와 같은 대형 언어모델이 연산하고 응답하는 과정에 이전 문장과 대화 내용을 기억해두는 임시 데이터(키-밸류 값)를 지칭한다. 이는 답변 속도와 코딩 또는 이미지 생성 등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연산 능력과 별개로 방대한 메모리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배경이 된다.

최 회장은 또 현재의 일반적인 정액 구독형 모델이 아닌 토큰 기반의 AI 프론티어랩 대형 언어모델 제품이 더 성장할 것으로 보고 관련 인프라 경쟁이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지금의 AI는 4~5살 아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AGI(범용인공지능)까지 가려면 엄청난 학습이 남았고, 데이터 절감 기술이 나와도 메모리 증가를 막을 방법은 별로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고객들의 공통 질문이 "메모리를 얼마나 줄 수 있느냐"뿐이라며 수요가 둔화되는 시점을 가늠하기 어렵다고 거듭 밝혔다.



◆ 나스닥 데뷔 성공했지만 한국 증시에 또 다른 변수…"ADR, 시장 파이 키울 것"



SK하이닉스 ADR이 나스닥 시장에서 상장 첫날 달러화 기반 현지 투자자들의 강한 수요를 보여줬지만, 해당 주식의 기초가 되는 신주가 한국거래소에 추가 상장하면서 국내 주주들에게는 또 다른 변수가 된다.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와 함께 시총 1조 달러 이상의 대형 기업이지만 메모리 반도체와 관련한 시장의 높은 집중도와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 등으로 인해 이례적인 가격 변동을 겪고 있다.

최 회장은 이번 ADR 상장으로 인한 가격 격차 우려에 대해 "완벽한 시장이라면 두 가격이 같겠지만 (원주와 ADR 사이) 갭은 생겼다 좁혀지기를 반복할 것"이라며 "SK텔레콤 ADR 때도 갭이 계속 벌어지는 일은 없었고, 파이를 쪼개는 게 아니라 AI로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기대를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전체 주식의 2.5% 규모로 제3자 배정 방식으로 신주를 발행한 뒤, 이를 기반으로 한 미국 예탁증서를 나스닥에 상장한 것으로, 이 과정에서 한국 주식과 미국 내 거래 가격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이번 공모 가격 역시 한국 거래 본주 대비 약 2.9% 수준의 프리미엄을 반영하고 있다.

최 회장은 이날 SK하이닉스의 한국 내 개인투자자 접근성을 위한 액면분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 보고 받은 바는 없지만, 요청이 오면 CFO가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한편 최 회장은 중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의 성장에 대해서는 “실제 위협을 느끼기 시작할 땐 이미 늦은 일이 될 것”이라며 “AI 붐으로 중국 업체들도 흑자 전환과 상장으로 투자 여력을 갖췄고, 추격 속도가 빨라지는 점을 당연하게 여기고 대비하겠다”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의 미국 상장 ADR은 이날 조건부 거래용 임시 티커 SKHYV로 거래를 시작했으며, 정규 거래는 오는 13일부터 SKHY 티커로 이날 거래 가격을 이어받을 예정이다. 이날 미국 뉴욕증시는 세계 최대 기업인 엔비디아가 장중 3.5% 가량 급등하는 등 AI 투자 둔화에 대한 우려를 덜어내며 S&P500 등 주요 3대 지수가 일제히 0.3% 가량 상승한 채 거래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