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사이클 후반부…삼전·닉스 다음은

입력 2026-04-27 10:00
에이전틱 AI가 불러온 토큰 수요 폭증 GPU→HBM→D램→SSD 반도체 릴레이 하반기부터 D램값 상승폭 둔화 전망 '생산량에 최고조' 사이클 후반부 특징


스스로 계획하고 행동하는 '에이전틱 AI'의 등장이 반도체 산업의 먹이사슬을 뒤흔들고 있다. 에이전틱 AI가 내뿜는 데이터(토큰) 처리를 위해 데이터센터가 풀가동되면서 시장의 관심은 칩 제조사를 넘어 공정에 들어가는 소모성 부품과 기판으로 급격히 이동 중이다. 반도체 업황이 생산량 확대로 승부하는 '사이클 후반부'에 진입함에 따라 AI 인프라 확장의 실질적인 수혜를 입을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에 대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분석이다.

● 에이전틱 AI와 '토큰 경제'가 만든 새로운 수요



최근 AI 시장의 핵심 키워드는 '토큰'이다. 토큰이란 AI가 문장을 이해하거나 생성할 때 사용하는 가장 작은 단위다. 단어나 문장 부호 등을 쪼갠 개념이다. AI가 더 똑똑해지고 인간처럼 복잡한 업무를 대행하는 '에이전틱 AI'로 진화할수록 토큰의 사용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KB증권에 따르면 3월 한 주 동안 전 세계에서 사용된 AI 토큰은 약 20조 4000억개에 달한다. 이는 1년 전과 비교하면 12배 급증한 수치다. 특히 업계 1위인 오픈AI의 올해 1분기 분당 토큰 사용량은 150억개로 직전 분기보다 2.5배 늘었고, 구글의 제미나이 역시 60%의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본부장은 "에이전틱 AI는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단계별 계획을 세우고 데이터를 생성하기 때문에 메모리 수요를 전방위적으로 끌어올린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HBM뿐 아니라 서버용 D램, 기업용 SSD, 저전력 고성능 메모리(LPDDR5X) 등 메모리 총량이 확대되는 질적 고도화 국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다.

● 가동률 100% 역설…'칩'보다 '부품'이 귀해진다



토큰 폭발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록적인 실적으로 증명됐다. SK하이닉스는 1분기 매출 52조 6000억원과 영업이익률 72%라는 전무후무한 수치를 기록했다.

D램 가격은 전분기 대비 60%대 중반, NAND는 70%대 중반까지 치솟았다. 칩 가격이 오르고 생산 라인은 풀가동되고 있다. 시장의 관심도 '얼마나 비싸게 파느냐'에서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느냐'로 이동하고 있다. 하반기에도 반도체 공급 부족은 지속되겠지만 가격 상승의 강도는 완화될 것이란 전망이다.

이민희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업황이 성숙기에 접어들면 반도체 가격 상승세는 둔화되지만 생산량은 최고조에 달한다"며 "공장 가동률이 극대화되는 이 시기에는 제품을 만들 때마다 갈아 끼워야 하는 소모성 부품과 기판 기업들이 부각된다"고 설명했다.

즉, 에이전틱 AI가 만든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공장을 돌릴수록 반도체 후공정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의 창고는 비워지기 무섭게 채워진다는 논리다.



● AI 칩 복잡성이 부른 기판과 소재의 '질적 도약'

에이전틱 AI용 반도체의 등장도 후공정 기업에 관심을 갖게끔 하는 요인이다.

에이전틱 AI용 반도체는 일반 칩보다 크기가 훨씬 크고 회로 구조도 복잡하다. 이는 단순히 부품을 많이 쓰는 것을 넘어 더 비싸고 고성능인 부품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가령 AI 가속기에는 수천 개의 회로를 촘촘히 쌓은 고사양 기판이 필수적이고, 제조 공정 중 발생하는 열과 불순물을 막아줄 고순도 소재의 중요성도 커진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AI는 이제 실리콘으로 건설된 인프라와 같다. 에이전틱 AI로의 진화는 인프라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 것을 요구한다"며 "큰 칩을 수용할 수 있는 대면적 기판과 가동률 상승에 따른 소모성 부품의 교체 주기 단축은 하반기 소부장 기업들의 실적을 견인할 핵심 변수"라고 진단했다.

● "아무 소부장이나 안돼"…밸류에이션과 기술적 해자 강조

증권가에서는 AI 인프라 확장과 가동률 상승의 교집합에 있는 분야의 기업에 주목하고 있다. BNK투자증권은 대덕전자와 원익QnC, SFA반도체를 눈여겨볼만하다고 제시했다.

기판 제조 기업인 대덕전자는 에이전틱 AI를 구동하는 고부가 기판인 MLB(다층 인쇄회로기판) 수요 증가에 대응하고 있다. AI 가속기가 커지고 회로가 복잡해질수록 기판의 대면적화와 고층화가 필수적이다. 대덕전자는 이 분야에서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실적 성장이 예상된다는게 이민희 연구원의 분석이다.

부품 분야에서는 공정 가동률과 직접 연결된 원익QnC의 환경이 긍정적이라고 내다봤다. 원익QnC가 만드는 쿼츠는 웨이퍼를 보호하는 소모성 부품이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가동률이 최대치에 근접하면서 쿼츠의 교체 주기가 도래했고,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연구원은 SFA반도체가 칩 제조사들의 생산 전략 변화에 따른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형 제조사들이 HBM 같은 첨단 메모리에 생산 역량을 집중하면서 범용 반도체의 조립과 검사를 담당하는 후공정 물량을 외주 업체로 대거 이전하고 있다"며 "매출 증가가 고정비 부담을 낮춰 이익이 급증하는 레버리지 효과가 기대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 수익 비율(PER)은 각각 4.9배, 3.4배 수준으로 역사적 저점 부근에 머물러 있다"며 "실적이 정점에 도달하기 전에 주가는 소부장 기업들을 중심으로 먼저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에이전틱 AI가 촉발한 공장 가동률 상승이 이들 기업의 실적으로 전이되는 시점을 포트폴리오 재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