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산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터져 나오는 비관론에 맞닿는다. 산업조직(IO) 스펙트럼상 초기에는 개별 기업이, 나중에는 해당 기업이 속한 산업에 대한 비관론이 많이 나온다. 주가 등 금융변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다.
3년 전 반도체 기업의 이윤이 급감하자 위기론이 제기됐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문제에 봉착한 테슬라가 이윤 감소 대책으로 추진한 가격 할인 대책마저 실패하자 반도체 위기론은 빙하기가 온다는 극단적인 비관론까지 나왔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과감하게 감산을 추진하고 AI 발전에 따른 수요까지 겹치면서 주가는 4배 이상 급등했다.
AI 비관론도 작년 11월 마이클 버리에 의해 제기된 이후 처음 나온 비관론은 신생아가 아니라 거인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미첼의 경고대로 잊을 만하면 강도가 더 세지면서 나오고 있다. 지난 2월에는 AI발 SaaS 종말론에 이어 가치, 투자, 레버리지, 오너쉽 등 4개 부문 모두가 지나치다(over)는 의미의 AI 총체적 위기론인 4Os까지 제기됐다.
이번에는 반도체와 AI의 동반 위기설이 나오고 있다. 구글이 터보 퀀트를 상용화해 AI 모델의 메모리 사용량이 6분의 1로 줄어들면 반도체 수요가 급감할 것이라는 우려로 삼성전자, SK 하이닉스 주가가 떨어지고 있다. 반도체 공급 절벽이 가져올 재앙을 고려해 자체 투자한 AI 기업도 4Os가 본격적으로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의문부터 제기하면 반도체와 AI의 동반 위기를 가져오면 왜 구글이 터보 퀀트를 개발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터보 퀀트에 대한 증시의 공포는 메모리 용량과 대역폭 간의 혼란에서 비롯된 오해다. 기술개발 역사를 보면 문샷 싱킹, 미션 임파서블 급의 신기술일수록 초기에는 그 실체를 잘못 파악해 비관론이 고개를 든다.
현재 AI 추론의 걸림돌은 메모리에서 데이터를 읽어주는 속도인 대역폭이 연산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병목 현상에 있다. 터보 퀀트는 사용자와 AI 모델 간 나눈 대회의 맥락을 저장하는 KV 캐시를 6배 이상으로 압축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데이터가 지나가는 통로인 대역폭의 부담이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AI 거품론이 나오는 가장 큰 근거인 매출액과 생산성 부족도 해소해 주는 효과도 기대된다. 산업의 라이프 사이클상 AI 기업의 주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미래 잠재 가치를 끌어올릴 확률도 높다. 터보 퀀트가 상용화되면 AI 기업의 주가수익비율(PER)은 지금 수준보다 절반 이하로 낮아지고 주가 무형자산 비율(PPR)은 PER보다 더 낮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도 AI판 제본스의 역설로 비관론보다 낙관론에 더 힘이 실린다. 터보 퀀트가 상용화돼 효율성이 높아지면 생산과 사용 비용이 줄어들면서 AI 시장이 더 커지고 반도체 수요 총량이 늘어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2027년까지 지속될 반도체 수퍼 사이클 국면이 그 이상 연장되는 빅 싸이클론이 나오고 있다.
터보 퀀트 발표 이후 거론되는 빅 싸이클론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반도체 빙히기 우려까지 나왔던 2년 전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이윤 감소’라는 공동 현안에 대해 테슬라와 삼성전자가 대응하는 방법은 정반대였다. 테슬라는 여섯 차례에 걸쳐 가격 할인 대책을 추진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대규모 감산 계획을 발표하고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이론적으로 기업이 이윤 감소를 극복하는 대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초기부터 매출과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가격(price) 할인’이다. 다른 하나는 초기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수급 여건이 개선되면서 매출과 점유율이 회복되고 어느 순간에 이윤이 대폭 증가하는 수량(quantity) 축소, 즉 ‘감산’이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의 대전제는 ‘시장경제와 균형이론이 얼마나 잘 작동되는가’ 여부다. 양대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못할 때 테슬라처럼 가격 할인 대책을 추진하면 시장의 실패(market’s failure)를 불러와 이윤이 더 감소하는 자충수가 될 확률이 높다. 이때는 삼성전자처럼 감산을 추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기업 간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시장경제가 잘 작동하지 않음에 따라 불균형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 인공지능(AI)과 관련 반도체가 주도해 나갈 앞으로는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여건에서는 특정 사건을 계기로 균형점에서 이탈했을 때는 시장 조절 기능에 의해 다시 수렴한다는 균형이론이 들어맞지 않는다.
오히려 1980년대 초에 태동된 배로 그로스만의 불균형 이론에서는 시장 조절 기능이 작동하는 데는 시간이 걸려 불균형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시장에만 맡겨 놓으면 재원 배분상 실패를 초래하고 참가자 모두 피해를 본다고 봤다. 이때는 국가가 개입하거나 선도기업이 나서서 수량을 조절해야 균형점을 되찾을 수 있다고 봤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한층 논의 중인 국가 자본주의도 이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업의 위상도 중요하다. 테슬라 같은 선도기업이 가격 할인을 추진하면 경쟁 여건이 빠르게 ‘블루오션’에서 ‘레드오션’으로 변하면서 초기에 확보한 기득권마저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감산은 삼성전자처럼 선도기업이 추진해야 수급 여건이 개선될 수 있고 가격이 오르면 해당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이 혜택을 보게 된다.
게임이론을 적용하면 더 명확해진다. 이 이론은 참가자별 이해득실에 따라 판가름 나는 ‘노이먼-내시식 이기적 게임’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샤프리-로스식 공생적 게임’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소비자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이 즐겨 써온 게임 방식이다. 후자는 시장 참여자들이 코로나 사태와 같은 전혀 예상치 못한 꼬리 위험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모두가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해 낼 수 있는 양식(architecture)을 제공해 준다.
테슬라의 가격 할인은 다른 기업의 점유율을 빼앗는 근린 궁핍적 이기적 게임이다. 삼성전자의 감산은 어려운 때일수록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참가자 모두에 혜택이 돌아가는 공생적 게임이다. 올해 1분기 삼성전자 실적이 영업이익 57조원, 매출액 137조원에 달하는 강한 어닝 서프라이즈(strong earning surprise)를 기록한 것이 그 결과다.
기업 이윤은 매출에서 각종 비용을 빼서 산출한다. 초불확실한 시대에는 기업 이윤에 대한 확신이 떨어지면 시장에서의 신뢰는 기하급수적으로 추락한다. 소셜미디어 발달로 서로가 촘촘히 연결된 사회에서는 부정적 뉴스가 긍정적인 뉴스보다 전파 속도가 여섯 배 이상 빠른 네트워킹 효과와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격 할인을 통한 포지티브 경영은 매출이 증가할수록 불확실한 위험에 더 노출돼 기업 이윤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게 하고 경영계획만을 수정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반면 감산을 통해 비용을 감축하는 네거티브 경영은 매출 증대애 따른 불확실성을 줄이면서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비용을 줄이면 기업 이윤에 대한 믿음이 늘어나게 된다.
네거티브 경영은 최근처럼 공급망 차질이 발생하는 여건에서 더 빛을 발한다. 산업 자체의 특성과 관계없이 매출과 점유율이 늘수록 비용이 증가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테슬라처럼 가격 할인을 추진하는 기업은 매출이 늘어나더라도 이윤이 감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두 기업의 운명도 엇갈려 왔다. 가격할인 대책 추진 이후 테슬라 실적과 주가는 정체돼 왔다. 하지만 감산 대책 이후 한때 위기론이 나왔던 삼성전자 실적은 작년 1분기 이후 크게 개선되면서 3배 이상올랐다. 다 큰 혜택을 보고 있는 SK 하이익스 뿐만 아니라 반도체 관련 기업의 주가는 삼성전자보다 더 크게 상승하고 있다.
앞으로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 주가가 ‘J-커브’ 궤적을 그릴 것으로 보는 것도 이 이유에서다. 간단한 수요와 공급 이론을 적용해 보면 터보 퀀트 개발로 초기에는 잘못된 선입견 등으로 수요 곡선이 좌측으로 이동돼 주가가 떨어지지만 이 기술의 실체가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하면 수요 곡선이 우측으로 이동돼 반도체 주가가 크게 상승한다.
기술 발전을 포함한 모든 성장 이론이 처음부터 속도가 가장 빠른 턴파이크인 노이먼 경로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경로를 거쳐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 경로를 찾아 이 길에 들어선다. 이제 막 태어난 터보 퀀텀이 이 길에 들어서기까지는 비관론은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만큼 일희일비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도 좋은 투자전략이다.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