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과 은 가격이 마침내 각각 4500달러, 70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이달 들어서는 연일 사상 최고치이 지속되고 있다.
올해 투자자산군별 수익률을 보면 은이 120%로 압도적으로 높고 한국 주식(코스피 지수) 75%, 금이 70% 순이다. 한국 투자자가 국장에 투자하고 전통적으로 선호해 왔던 금을 투자했더라면 올해는 그 어느 국민보다 높을 수익을 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과 은은 전쟁 발생과 같은 지정학적 위험이 높아지면 으레것 안전자산으로 추천됐다. 올해 들어서는 달러화와 미국 국채 위상이 종전만 못해 ‘최후 보루(final draw)’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였다. 실질 가치가 매장량 한계 등으로 늘 보전해 있는 점을 들어 인플레이션이 우려될 때마다 헤지 수단으로도 선호됐다.
올해 금과 은은 지정학적 위험과 인플레이션 여부와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올랐다. 세계지정학적지수(WGI)와 금 가격 간 상관계수를 보면 작년까지 0.8에서 올해 들어서는 0.3 내외로 의미가 없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지난 9월 이후 세계물가지수(WPI)와 금 가격 간 상관계수는 아예 마이너스 국면으로 전환됐다.
국가부도와 관련해서도 2011년 셧다운 종료 이후 금은 1900달러에서 1060달러로, 은은 30달러대에서 14달러대로 폭락(flash crash)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셧다운이 최장기로 길어졌는 데도 종료 이후 급등(skyrocketing)하고 있다. 금과 은은 전쟁, 물가, 국가부도 여부와 관계없이 오르는 것은 가격 결정 요인에 구조적인 변화가 일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뉴노멀’이 붙을 정도로 금과 은값의 고공행진을 지속시키는 요인으로 ‘탈법정화폐 거래(debasement trade)’를 우선적으로 꼽는다. 탈법정화폐 거래란 법정화폐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실질 가치와 화폐 기능을 동시에 지닌 투자 대상이 선호되는 트렌드를 말한다. 200년 이상 지속돼온 법정화폐가 사라지면 각국 중앙은행 통화 정책과 국민의 화폐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명목상 종이에 불과한 법정화폐가 제 기능을 수행하려면 국가가 부여한 공신력에 대한 신뢰가 깨져선 안 된다. 법정화폐의 공신력은 양대 요건에 따라 좌우된다. 하나는 독점적인 주조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물가 안정 목표가 잘 지켜져야 한다. 두 조건 모두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연관된다.
트럼프 집권 1기부터 우려됐던 미 중앙은행(Fed)의 독립성은 2기 들어 급격히 훼손되고 있다. 통화정책 목표 수정, 기준금리 변경, 차지 의장을 포함한 Fed의 개편, 예고 없는 Fed 방문, Fed 예산안 장악 등으로 흔들어왔기 때문이다. Fed 설립 후 대통령과 Fed 의장 간 갈등 지수를 추적해 보면 트럼프 대통령과 제롬 파월 의장 때가 최고 수준이다.
미란 보고서와 함께 트럼프노믹스 2.0의 근간인 ‘프로젝트 2025’의 시나리오대로 간다면 Fed는 독립성 훼손을 넘어 트럼프 대통령의 시녀로 전락한다. 개편을 넘어 궁극적으로 폐지하는 방안까지 담겨 있어서다. 중앙은행의 독점적인 주조권도 코인 등 민간에서 발행한 대안화폐를 통해 분산화한다는 계획이다.
중앙은행 독립성이 훼손되면 1선 목표인 물가 안정은 요원해진다. 최근처럼 성장률(g)이 이자율(r)보다 높으면 빚을 내 돈을 더 써도 좋다는 토마스 피케티 공식과 현대통화이론에 근거한 재정 지출이 유행한다. 이럴 때 중앙은행이 길항 역할을 못하면 물가는 오를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 요구대로 금리까지 낮추면 물가가 말이 뛰는 식으로 오르는 ‘갤로핑 하이퍼 인플레이션’ 국면도 닥칠 수 있다.
양대 조건이 흐트러져 법정화폐의 신뢰가 떨어지면 퇴장했던 통화가 빠르게 제도권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 화폐의 3대 기능 중 이미 거래와 회계의 단위로 대안화폐가 보편화된 여건에서는 가치 저장 기능으로 법정화폐 보유에 따른 기회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경기순환 국면과 관계없이 통화유통속도, 통화승수와 같은 경제 활력 지표가 높아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탈법정화폐 거래 최적의 대안으로 화폐와 인플레이션 헤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금이 급부상하고 있다. 달러화와 미국 국채의 신뢰가 떨어지면서 안전자산 선택 범위가 제한된 것도 금값 상승 요인이다. 중심 통화를 달러 대신 금으로 되돌려야 하지 않느냐는 금본위제 논의가 오랜만에 고개를 들고 있다.
금보다는 못하지만 스테이블 코인도 탈법정화폐 거래 대상이다. 가치 면에서 법정화폐보다 유리하고 지니어스법 통과 후엔 화폐 기능까지 공식적으로 부여됐기 때문이다. 같은 코인 중에서는 생산량이 제한된 비트코인보다 알트코인의 상징 격인 이더리움 확장성이 높아 가격이 더 높게 형성되고 있다.
전통적인 재테크 대상인 주식과 채권만 놓고 보면 주식이 더 유리하다. 금융이 실물을 주도하는 시대엔 위험자산과 안전자산 간 반비례 관계가 약화했다. 지난해 9월 이후 Fed가 금리를 낮추는 여건에서 주식 수익률이 국채보다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Fed를 비롯한 중앙은행 독립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탈법정화폐 거래는 더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틸법정화폐 거래는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은 차기 의장까지 포함해 트럼프 정부가 Fed를 장악하는 실질적인 첫해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중앙은행도 통수권자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yes(자유롭다)’고 답할 수 있는 곳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유일하다.
내년에 금을 비롯한 귀금속과 주식이 계속해서 유망할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은 금값은 5000달러, 은값은 100달러를 무난히 넘길 것으로 예상했다. S&P 500 지수도 최대 8100까지 갈 것으로 보는 가운데 평균적으로는 7700선까지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금과 S&P 지수 모두 올해보다 10%가 넘는 수준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귀금속 투자에 개인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블러드 다이아몬드 사태가 발생할 것인가가 또다른 관심사다. 다이아몬드는 인조 재생이 가능하지만 금과 은은 원소주가율표상 대체가 불가능한 주공급 원소인 점을 고려하면 아다마스 환상이 피로 물들여져 종말을 맞은 다이아몬처럼 ‘블러드 골드러시(blood gold rush)’ 사태가 발생할 확률은 낮다.
하지만 금과 은값이 올라갈수록 거품 우려기가 제기되는 만큼 골드바와 같은 유럽식 골드뱅킹보다 금, 은을 대상으로 하는 ETF 등과 같은 금융상품에 가입하는 미국식 골드뱅킹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의 금 투자자는 그 어느 국민보다 골드바와 같은 실물 투자를 고집하는 만큼 이 점은 특별히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문제는 한국은행이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당시 외화 보유 다변화 차원에서 금을 매입한 것이 폭락한 낙인 효과로 10년 이상 동안 금을 매입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금값이 오리는 것이 탈법정화폐 거래와 같은 중앙은행 고유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만큼 한국은행이 금을 매입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른 중앙은행은 금을 꾸준히 매입해 딜러화에 집증된 외화 보유를 다변화하는 가운데 막대한 차익으로 해당국 국민의 세 부담을 줄이고 환율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이런 흐름을 외면해 우리 경제가 당면한 최대한 현안인 환율 안정 문제 등에 한계를 보이는 것은 국민 입장에서는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상춘/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