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제조업체인 퀄컴(티커명 QCOM)이 시장 예상을 웃도는 실적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의 세법 변경으로 약 31억 2천만 달러(약 4조 4천600억 원)에 달하는 순손실을 기록해 월가의 차익실현 움직임을 자극했다.
현지시간 5일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퀄컴 주가는 실적 발표 후 오후 6시 현재 시간외 거래에서 약 3% 하락한 채 거래 중이다. 전날 AMD의 호실적 등으로 올렸던 상승분을 도로 반납한 상태다.
이날 하락에 대해 최근 몇 주간 주가가 상승세를 보인 탓에 이번 실적 발표가 투자자들의 높아진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어려웠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씨포트 글로벌 시큐리티즈의 제이 골드버그 애널리스트는 블룸버그를 통해 "사람들은 더 큰 상승 여력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 세금 폭탄 제외하면 '깜짝 실적'...1분기 가이던스 컨센서스 상회
퀄컴이 이날 장 마감 이후 발표한 2025회계연도 4분기(7~9월) 실적은 대체로 시장 예상을 뛰어넘었다. 총 매출은 113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0% 증가하며 애널리스트 예상치 108억 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조정 주당순이익(EPS) 역시 3달러로 컨센서스 2.88달러를 상회했다. 스마트폰 시장의 견조한 수요와 자동차, PC, 데이터센터로의 사업 다각화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는 평가다.
2026회계연도 1분기(10~12월) 가이던스도 인상적이다. 매출은 약 122억 달러, 조정 EPS는 3.40달러로 LSEG 등이 집계한 애널리스트 예상치인 매출 116억 달러, EPS 3.26달러를 각각 웃돌았다.
문제는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 도입 당시 달라진 미국의 세법 변경으로 세금 충당금을 한 번에 반영하면서 재무제표에 흠집을 남겼다는 점이다. 퀄컴은 이번 분기 57억 달러, 우리 돈으로 무려 8조 1,500억 원에 달하는 세금 충당금을 계상하며 일반 회계기준(GAAP) 기준 31억 2천만 달러의 적자로 전환했다. 앞서 메타 플랫폼 등 다른 빅테크 기업들도 최근 세금 조정으로 인한 대규모 일회성 비용을 보고한 바 있다.
퀄컴은 이러한 변화가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회사는 앞으로 13~14%의 안정적인 세율을 적용하는 대체 최저한세(CAMT)를 사용할 예정으로, 이번 일시적인 조치가 없었다면 세금 납부 부담이 오히려 커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스마트폰 의존도 탈피 가시화...자동차·AI칩 '쌍끌이'
재무제표의 완벽함은 포기했지만, 퀄컴의 사업 다각화는 눈에 띄는 진전을 보이고 있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최고경영자(CEO)는 애플 의존을 줄이고, 전통 수익원이던 스마트폰 비중을 꾸준히 줄여왔다.
4분기 스마트폰 관련 매출은 약 69억 2천100만 달러로 전체 매출의 61.8%를 차지하는 핵심 사업이지만, 이번 실적에선 차량용 반도체가 사상 처음 10억 5천만 달러를 돌파하며 전체 매출 비중 9.4%까지 증가했다.
커넥티드 디바이스 부문은 18억 700만 달러로 16.1%, 라이선스 부문(QTL)은 14억 900만 달러로 12.6%를 기록했다. 차량용 반도체는 전기차뿐만 아니라 하이브리드 차량 등의 인포테인먼트에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을 통합한 제품 라인이 비중을 늘리고 있다.
도이치뱅크는 지난 8월 보고서에서 "퀄컴의 차량용 반도체는 디지털 콕핏에 ADAS를 통합 구현하는 방식으로 차별화되고 있다"고 분석했고, JP모건도 "향후 4년간 확보된 수주로 예측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스마트폰 시장이 저가형과 고급형으로 나뉘는 현상도 퀄컴에게는 긍정적이다. 번스타인의 스테이시 라곤 애널리스트는 "애플의 자체 모뎀칩 전환이 아이폰 에어 같은 일부 모델에는 적용되겠지만, 주력 모델에는 여전히 퀄컴을 사용할 것"이라며 "타격이 예상보다 완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AI 구동을 위한 프리미엄 스마트폰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면서 고급형 기기로의 업그레이드 추세가 뚜렷하다. 퀄컴 관계자는 "스마트폰 시장이 저가형과 프리미엄으로 양극화되면서 중간 가격대 제품이 거의 사라졌다"며 "중국, 인도 등에서 이러한 현상이 확인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시리즈 등 스냅드래곤 8 엘리트 탑재 스마트폰의 성공적인 출시로 프리미엄 시장에서 퀄컴의 입지는 여전히 강력하다. 애플의 아이폰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AI를 연동한 스마트폰 앱의 고도화로 교체 주기가 다가오면서 월가는 관련 매출에 대한 기대를 이어가고 있다.
◆ AI 데이터센터 진출...엔비디아 아성 흔들 수 있을까
퀄컴은 지난 10월 말 엔비디아의 데이터센터 시장 지배력에 틈새 시장을 공략할 인공지능(AI) 반도체 라인업을 공개해 시장을 놀라게 했다.
AI200과 AI250으로 명명된 이 제품들은 내년 첫 출하가 예정돼 있으며, 첫 고객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지원하는 AI 스타트업 휴메인이다. 계약 규모는 2027년부터 20억 달러에 달한다.
이 AI 추론 반도체들은 저전력 반도체 설계를 바탕으로 서버 랙 단위 성능을 제공하며 대규모 언어모델(LLM) 구동에 특화돼 있다. 메모리 대역폭을 확대해 추론 성능의 효율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한편 퀄컴은 애플이 자체 모뎀칩으로 전환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에서 점점 더 치열한 경쟁에 직면하고 있다. 애플은 휴대전화를 셀룰러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모뎀 부문에서 저가형 제품 라인부터 퀄컴 제품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변수 가운데 미국과 중국 간 갈등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은 최근 크게 덜어냈다. 지난달 말 APEC 정상회의에서 만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무역 완화 협상에는 중국의 퀄컴에 대한 반독점 조사를 종료하기로 한 합의가 포함됐다.
◆ 월가 "세금은 일회성...본질은 견조"
시장의 반응은 엇갈린다. CFRA는 강력매수 의견과 목표가 220달러를 제시하며 "2027년 예상 EPS 대비 주가수익비율(PER) 17.9배로 저평가됐다"고 평가했다. 스마트폰 시장 의존도를 줄이고 자동차와 사물인터넷(IoT) 확장을 통해 애플 리스크를 상쇄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반면 모닝스타는 보유 등급의 의견과 적정가격 185달러를 제시했다. 무선통신 특허(QTL)와 반도체 설계(QCT) 부문의 경제적 해자를 인정하면서도, 애플의 모뎀칩 자체 개발이 중장기적 역풍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월가 투자은행 전망에서 37개 기관 중 약 46%는 매수, 51%가 중립, 3%가 매도 의견을 유지 중이다. 대부분의 애널리스트들은 이번 세금 관련 손실을 일회성으로 평가하며 퀄컴의 본질적인 사업 체력에 주목하고 있다.
퀄컴은 일회성 세금 충격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사업 모델과 현금 창출 능력을 바탕으로 스마트폰 의존도를 줄이고 자동차, PC, 데이터센터 등 신사업 영역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남아있는 최대 변수인 애플 리스크 관리와 엔비디아가 독주하는 AI 데이터센터 시장에서의 가시적인 성과가 퀄컴의 미래 가치를 결정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