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 제도가 문제다"…韓증시 '조로화·공동화' [국제경제읽기 한상춘]

입력 2024-09-23 09:15
수정 2024-09-23 09:41



'돈을 벌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지만 이를 채워줄 수 있는 투자 대상은 유한하다'. 투자론의 첫 페이지를 열면 제일 먼저 접하는 '투자 대상의 희소성 법칙'이다. 이 법칙을 어떻게 풀 것인가가 모든 금융사의 존립 근거이자 포트폴리오의 알파(α)이자 오메가(Ω)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시장 신호에 의한 방법이다. 특정 종목에 대한 기대가 높은 투자자는 높은 가격을 써낼 의향이 있고, 그 신호대로 해당 종목을 배분하면 된다. 가장 간단하고 이상적인 방법으로 비춰진다. 이 때문에 정부와 기업, 그리고 투자자는 주식시장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간단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이상적이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 완전경쟁은 아니더라도 주식시장이 잘 작동되기 위해서는 공급자(기업), 수요자(개인 투자자) 등 참가자가 충분히 많아야 하고 투자 종목도 이질적이지 않아야 한다. 정보의 비대칭성도 크게 차이가 나서는 안 된다.

'경합성'과 '배제성의 원칙'도 잘 적용돼야 한다. 경합성 이란 유망한 종목을 차지하지 하기 위한 투자자 간 경쟁을, 배제성이란 돈을 지불한 투자자만이 해당 종목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돈의 속성상 이런 전제와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주식시장의 다양한 자금조달과 건전한 재산증식 기능은 쉽게 무너진다.

주식시장에서 인간의 합리성은 투자하는 종목의 가치와 주가로 나타난다. 가치에 합당한 주가가 형성되면 '합리적(균형 혹은 적정 주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비합리적(불균형 혹은 고평가와 저평가)'으로 판단된다. 인간의 합리성을 전제로 한 주류 경제학에서는 특정사건으로 균형에서 이탈되면 가격조정기능에 의해 이 점에 수렴된다고 봤다.

균형이론도 들어맞지 않을 때가 많다. 1980년대 초 스태그플레이션 당시 태동됐던 불균형 이론에 따르면 특정 사건을 계기로 균형에서 이탈했을 때 시장조절기능에 의해 이 점에 수렴된다고 봤던 균형이론과 달리 시장조절기능이 무너져 균형에 도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장조절기능이 작동되지 않은 상황에서 균형에 도달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불균형론자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가격(price)'이 아니라 '수량(quantity)'에 의한 조정방식'이다. 미국 메사추세츠 주립대의 이사벨로 웨버 교수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인상 대신 '가격 상한제'를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방안이다.

'합리적 인간'과 '균형이론' 조건이 무너지면 시장경제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시장의 실패'로 국내 주식시장처럼 가치가 주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불균형 여건이 오랫동안 지속됨에 따라 정책당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밸류업 대책'이란 명목으로 나서고 있다. 과연 최선의 결과를 줄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이런 말이 자주 들린다. "미국 주가가 올라갈 때는 찔끔 올라가다가 내려갈 때는 대폭 내려간다." "주식 투자에서 돈을 벌려면 '국장(國場·한국 증시)'은 안되고 '미장(美場·미국 증시)에 가야 한다." 한·미 경제발전단계를 고려할 때 정반대 현상이 발생해야 한다. 한국 증시의 복원력(resilence) 상실, 즉 조로화 문제다.

증시만큼 '세이의 법칙(Say's law·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이 적용되는 시장도 없다. 코로나 사태 이후 금융이 실물보다 3배 이상 커진 데다 주식 투자자의 수요만큼 다양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증시 정책은 공급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주식수요 촉진책은 수급상 '병목'과 '불일치'현상이 나타날 때만 그쳐야 한다는 의미다.

'공급 요인이야 수요 요인이냐'는 경제학의 인식(acknowledge) 문제가 있긴 하지만 한국의 증시대책은 후자에 초점을 맞춰 추진해 왔다. 케인즈언의 총수요 관리 대책에서 보듯이 주식수요 촉진책이 정책당국과 증시 유관기관이 주도권을 쥐고 추진할 때는 '정부의 실패'로 연결되고 누적되면 하드웨어 위상에 맞게 포트폴리오 위상이 따라오지 못한다.

공급중시 증시대책은 '포지티브 방식(원칙 규제·예외 허용)'보다 '네거티브 방식(원칙 허용·예외 규제)을 취해야 한다. 후자의 방식을 취하더라도 물가가 목표치를 웃돌 때는 자동적으로 금리를 올리는 방식처럼 '준칙(rule)'을 설정해 운영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당국과 증시 유관기관의 재량적 여지를 최소화할 수 있다.

상장 준칙은 어떻게 설정하고 운영해야 하는가? 그 답은 문재인 정부의 실패 사례를 되짚어 보면 구할 수 있다. 재정준칙을 도입하는 것은 정책당국의 자유 재량적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의도다. 이 때문에 △법적 근거는 가능한 최상위법에 둬야 하고 △관리기준은 엄격히 규정 적용해야 하며 △위반할 때는 강력한 제재가 뒤따라야 한다.

문 정부의 재정준칙은 법적 요건부터 법률체계 상 하위에 속하는 '시행령'에 뒀다. 당시 기재부는 시행령도 법률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반박했지만 이 제도를 도입한 170개국 중 70%가 넘는 국가가 지금도 '헌법'이나 '법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상장 준칙은 최소한 실증법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관리 기준도 GDP대비 국가채무비율이 60%, 통합 재정수지 적자비율이 3% 이내로 하되 어느 한 기준이 초과하더라도 다른 기준이 밑돌면 문제가 없다는 시각이었다. 오히려 두 기준 중 어느 하나라도 초과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엄격성'에 부합된다. 상장 준칙도 각 기준 간 엇갈릴 때는 '합집합(union)'보다 '교집합(intersection)' 방식으로 관리해야 한다.

이행 요건에서는 재정의 하방 경직성을 고려하면 선제적인 관리가 중요하다. 이 때문에 당장 이행해야 하는 '시급성'이 따라야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재정준칙은 2025년에 가서야 적용한다고 해 '많이 써도 괜찮다'는 해석이 가능했다. 재정준칙을 지키지 못할 경우 제재 수단도 안 보였다. 상장 준칙은 빠른 시일 내에 만들어 시행해야 한다.

증시 제도 가운데 준칙을 설정 운용해야 할 곳(특히 바이오 기업)이 상장 제도다. 기업의 구미에 맞는 자금조달과 국민의 다양한 재산 증시 창구인 증시가 활성화돼야 모든 경제 활동이 탄력을 받는다. 준칙에 맞으면 가능한 많은 기업이 상장돼야 하고 상장기업이라도 어겼을 때는 자동적으로 폐지돼야 한국 증시가 늘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 상장 제도는 최악의 경우를 선택하고 있다. 기업이 상장될 때는 법 이외에 그때그때마다 다른 요건일 요구하고 있다. 상장된 기업이 좀비가 됐지만 폐지시키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머물러 있다. 미국의 상장 제도와 정반대 현상으로 한국 기업과 투자자가 미국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한국 증시의 공동화를 낳는 요인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이미 좀비가 된 상장기업의 퇴출 통로인 '세컨더리 마켓'부터 활성화시키야 한다. 상장 이전이라도 불확실성 시대에 가장 먼저 총대를 메는 초기 투자자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인수·합병(M&A) 시장을 육성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자본시장 선진화는 은행보다 증시를 통해 모든 경제 활동의 원칙인 돈이 잘 돌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우리처럼 국회가 정책당국과 증시 유관기관보다 우위에 있는 국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법(law)'이 국민 전체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층의 기득권(정당이나 국회의원도 포함)을 옹호하거나 새로운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다. 입법단계부터 특정층의 이익을 반영하면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반하더라도 처벌할 길이 막연해지기 때문이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