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연락처 내놔" 이 와중에도 '블랙리스트級' 환자가 [김수진의 5분 건강투자]

입력 2024-09-17 08:00
수정 2024-09-17 08:36


"추석에 아프지 마세요"

올해의 추석 인사말은 유독 특이했다. 6개월 넘게 지속된 의정갈등이 전공의 사직, 대학병원의 의료진 인력부족으로 이어져서다. 병원·의사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과거에 비해 대학병원서 의사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특정 의사에 한해 '병·의원에서 암으로 진단받은 경우만 진료가 가능하다'는 곳도 많다. 인력이 부족하니 경증 환자는 1·2차 병원을 찾길 권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도 진료 현장에 혼선을 더하는 '요지경 환자'가 존재한다. 문제는 이런 경우가 의료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지고, 다른 환자들이 피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아래는 몇 가지 실제 상황이다.

#1 꽤 자주 생기는 이야기

심정지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왔다. 의료진은 몇 초로 생사가 갈릴 수 있는 심정지 환자에 매달린다. 어떤 환자의 가족이 심정지 환자에게 달려간 의료진을 향해 우리가 먼저인데 왜 저 환자를 보냐며, 응급실에 고성이 1시간 가량 오갔다. 다른 응급 환자들의 처치는 미묘하게 지연됐다. 응급실은 선착순이 아니다. '얼마나 심각하냐'가 순서를 결정한다. 난동 가족의 환자는 이미 1차 처치를 받은 상태였다.

#2 "예약은 무슨, 연락처 내놔"

대학병원 암센터. 한 남자가 20분째 접수대에서 실갱이를 벌이고 있다. 진료날이 아니지만 병원에 온 김에 진단서를 받아가겠다는 환자. 진료날 예약을 잡고, 의사 진찰 후 발급이 가능하다는 설명에도 당장 써달라는 성화다. 담당 의사는 오늘 외래 진료가 없다. 의료법상 의사가 아닌 의료진은 소견서 발급이 불가능하며 의사가 직접 진찰한 후에 작성돼야 한다. "가능한 간호사나 닥터(의사) 전화번호를 주면 직접 전화할테니 당장 연락처를 내놓으라"며 큰소리가 오간다. 업무는 잠시 중단됐다. 남자 뒤로는 어느덧 환자들의 줄이 만들어졌고, 이들의 대기 시간도 길어져버렸다.



#3 "의사양반, 밤길 조심하쇼"

의사 A씨의 담당 환자는 최근 병동에서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의료사고가 아닌, 환자 상태 악화가 원인이었다. 이후 환자의 가족이 외래로 찾아왔다. 조직폭력배와 함께. 품에서 얼핏 보이는 날붙이와 함께 "밤길 조심하라"는 경고를 몇 차례 들었다. A씨는 "이 일이 있을 때 마다 개인적으로 힘든 건 물론이고, 다음 번 환자에게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블랙'되어도 속수무책, 피해 돌고 돌아 환자에게

일차적으로는 의료진이 피해를 입지만, 나비효과로 피해를 입는 건 결국 다른 환자다.

대학병원 의료진 B씨는 "의정갈등 이후 특이 환자가 체감상 많아졌다"며 "병명을 바꿔달라"며 병원에 돗자리를 깔고 누운 환자부터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리는 환자까지 다양한데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런 일이 겹치면 뒷 진료가 줄줄이 밀린다"고 말했다. B씨는 "내 주변에는 진상 환자가 다녀가면 이후 환자에게 집중이 어려워 의료 질이 떨어진다며, 진료실 옆방에 샌드백을 두고 필요할때 사용하는 의사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의료진 C씨는 "전공의 사직 이후 환자-의사가 갈라치기 되면서 서로에 대한 의식이 더 좋지 않아졌다"며 "환자는 의사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가고 있고, 의사는 더욱 방어적으로 진료하고 있다"고 말했다.

병원에는 '환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의료진에게 흉기를 휘두를 정도로 심각한 경우만 기재되며, 기재된다 해도 병원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블랙 환자가 오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병원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블랙 환자가 오면 조심하는 정도다, 아픈 사람이기 때문에 진료를 거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최근 의료현장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응급실에서 진료 거부가 가능한 사유(응급의료 종사자에 대한 폭행, 협박 등)를 밝혔지만, 일반 진료시는 지침이 없다.

환자 차원에서 의정갈등 상황을 해결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의료 현장에서 의료진과 다른 환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는 있다. 배려 의식을 갖춘 의료 소비자가 필요한 이유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