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출신 예술가이자 예수회 사제인 마르코 루프니크(69) 신부의 수녀 성학대 혐의가 드러나면서 그의 작품 철거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탈리아 일간지 쿠오티디아노나치오날레는 5일(현지시간) 루프니크 신부의 피해자들이 작품 철거를 강하게 요구하지만 작품 존치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고 보도했다.
루프니크 신부는 1980년부터 2018년까지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로마에서 수녀를 포함해 약 25명의 여성을 성적, 심리적, 영적으로 학대한 혐의로 사법 당국에 고발됐다.
아직 재판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피해자들의 증언과 언론보도가 잇따르면서 유죄가 기정사실로 되는 분위기다.
문제는 그가 독특한 모자이크와 그림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가로서 전 세계 200여개 성당과 성지에 그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는 점이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국립 성지, 스페인 마드리드 중심부의 알무데나 대성당, 프랑스 루르드 성모 발현지 로사리오 대성당, 교황청 사도궁 모자이크 그림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미국 가톨릭 매체 NCR은 '루프니크 신부의 작품을 철거해야 할 때'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그의 모자이크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정신을 고양하는 목적을 더는 달성할 수 없다"며 철거를 촉구했다.
전 세계 신자들도 철거를 요구하고 있지만 가톨릭교회는 사법부에서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루르드 성지를 관할하는 장 미카스 주교는 "아직 철거를 위한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야간에 루프니크의 모자이크 작품을 밝히는 조명을 끄는 방식으로 임시 조치했다.
반면 루프니크의 작품을 존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교황청 홍보부 파올로 루피니 장관은 몇 주 전 "예술을 제거, 취소, 파괴하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논리라면 예술가면서 동시에 살인자였던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카바라조(1571-1610)의 작품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탈리아의 한 추기경은 "루프니크의 작품을 철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사법부 판결이 나올 때까지 일단은 루프니크의 작품을 가림막으로 가려서 일단 못 보게 해야 한다는 중재안도 제시됐다.
교황청 미성년자보호위원회 위원장인 숀 패트릭 오말리 추기경은 "사목적 신중함을 발휘해 루프니크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루프니크 신부 성범죄 사건은 2022년 말 이탈리아 언론매체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피해자의 잇단 고발에도 교황청이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그에게 거의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은 사실도 보도로 드러나면서 가톨릭 교계 안팎에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1월 AP 통신과 인터뷰에서 이 성범죄 사실을 전해 듣고 "나는 정말, 너무나 놀랐다. 그 정도 수준의 예술가가 그러다니 나는 정말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교황의 지시로 교황청은 지난해 10월 재조사에 나섰고 공소시효를 없앴다.
지난해 6월 예수회에서 축출된 루프니크 신부는 현재 고향인 슬로베니아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