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증시가 반도체·인공지능(AI)에 대한 정치적인 불확실성으로 인해 강한 조정을 받았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만 방위비 관련 언급이 시장에 악재로 작용했다.
현지시간 17일 뉴욕증권거래소에서 S&P500 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78.93포인트, 1.39% 내린 5,588.27에 그쳤다. 기술주로 구성된 나스닥 지수는 전날보다 512.41포인트, 2.77% 폭락했다. 이는 2020년 이후 나스닥이 일간 기준 기록한 최대 낙폭이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전날에 이어 243.6포인트, 0.59% 오른 4만 1,198.08포인트,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다우지수는 애플과 아마존 등 편입 기술주는 하락했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과 경기부양에 대한 기대로 인해 관련 수혜주에 자금이 몰리는 '트럼프 트레이드' 영향에 제조, 방산, 제약주 등의 강세가 이어졌다. 순환매로 인해 최근 강세를 이어가던 중소형주 2천개 종목으로 구성한 러셀2000 지수는 이날 2.35포인트, 1.05% 하락해 6일 만에 약세를 보였다.
● 트럼프의 대만 때리기에…반도체 인덱스 6% 급락
미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가 전날 공개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는 대중국 규제, 관세, 기후 정책과 관련된 발언으로 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국에 대한 관세 60% 부과 시 엔비디아와 애플, 퀄컴 등이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 "관세는 경제적으로 경이로운 역할을 하고, 협상에 유리한 요소가 된다"며 "잠재적으로 적대적일 수 있는 나라들도 뭐든지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공격할 것에 대비해 대만을 방어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만은 (미국의) 반도체 사업을 100% 가져갔다"며 "제 생각에는 미국에게 방위비를 지불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은 보험회사와 다를 것 없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후와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도 "미국에겐 더 저렴한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풍력은 비싸고, 날개는 탄소로 되어 처리하기도 어렵다"며 "보조금을 받는 에너지 정책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제롬 파월 의장의 임기에 대한 압박도 이어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갈등을 겪은 적이 있지만, 그가 옳은 일을 한다 생각했다면 그냥 두었을 것"이라며 "11월 5일(미 대선일)까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당선 가능성이 높아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 뿐만 아니라 바이든 현 행정부의 대중국 강경책도 시장에 악재로 작용했다.
이날 블룸버그는 미국 정부가 해외 직접제품 규칙(FDPR)을 이용해 무역규제를 강화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FDPR은은 미국 기술이 조금이라도 사용이 되었다면 외국산 제품이라 하더라도 수출 통제를 할 수 있는 제도다.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긴장이 높아진 가운데 ASML의 실적 전망치마저 기대치를 밑돌아 반도체주 주가 하락의 기폭제가 됐다. ASML은 2분기 순익은 15억 8천만 유로로 월가 전망치 14억 3천만 유로를 웃돌았고, 순주문은 56억 유로로 1년 만에 24% 늘었다. 하지만 다음 분기 실적은 67억~73억 유로로 제시해 예상치 75억 달러를 밑돌았다.
이날 ASML은 하루 만에 마이너스(-) 12% 내렸고, 엔비디아가 -6.62%, 브로드컴은 7.9% 하락했다. 실적 발표를 앞둔 TSMC는 -7.98%, 램리서치와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가 각각 -10%씩 하락했다.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는 이날 하루에만 -6.81% 급락했다. 다만 이날 인텔은 개장 초 한 때 6%대 상승 한 뒤 종가 기준 0.35% 오른 채 거래를 마쳤다. 이에 대해 다코다 웰스 매니지먼트의 로버트 파블릭 수석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는 "인텔은 트럼프 대만 발언의 수혜자"라고 평가했다. 인터렉티브브로커스의 스티브 소스닉 전략가는 “반도체 주식은 정치권 양쪽에서 영향 받고 있다"며 "실적이 우수한 기술주에서 나온 순환매는 이제 더 큰 흐름으로 바뀌어 투자자들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 비만치료제 시장도 격랑…헬스케어 섹터에서 빛난 존슨앤드존슨
전반적으로 랠리의 숨고르기가 나타난 시장이지만 제약, 유통, 소비, 제조, 금융주는 상대적으로 하락폭이 덜했다. 이 가운데 헬스케어 업체인 존슨앤드존슨은 기대 이상의 실적으로 3.69% 뛰었다.
존슨앤드존슨은 2분기 매출액이 224억 달러로 전년대비 4.3% 늘고, 조정 주당순익은 2.82달러로 같은 기간 10.2% 증가했다. 주력 약품 가운데 다발성 골수총 치료제인 다르잘렉스 매출이 전년대비 18.4%, 궤양성 대장염 치료제인 스텔라라 매출이 3.1% 늘어 실적을 이끌었다. 존슨앤드존슨은 쇼크웨이브메이컬 인수 이후 연간 매출 전망을 892억~896억 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헬스케어 분야에서 올들어 가장 큰 상승을 보이던 비만치료제 기업들은 일제히 조정을 받았다. 스위스 제약사인 로슈가 하루 한 번 복용만으로 체중 감량이 가능한 CT-996이라는 신약 임상 1상에 성공했다는 발표 영향이다. 로슈는 해당 약물을 제2 형 당뇨가 없는 비만 환자를 대상으로 4주간 복용시킨 결과 체중을 6.1% 줄일 수 있었다고 공개했다. 이 소식으로 노보노디스크와 일라이릴리가 각각 -3.8% 내렸고, 버텍스 파마슈티컬은 -12% 급락했다.
● 매파도 비둘기파도 "인하 가까워졌다"…베이지북도 '물가 진전'
이런 가운데 연준 위원들은 기준금리 인하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존 윌리엄스 뉴욕연은 총재는 월스트리트저널(WSJ) 와의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의 광범위한 하락이 나타났다"며 "바라던 디플레이션 추세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연준 인사 가운데 대표적 매파로 분류되는 크리스토퍼 월러 이사는 캔자스시키 연은 행사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금리인하가 필요한 시점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밝혔다.
월러 이사는 "일자리는 과도하지 않고, 임금은 안저적인 물가와 거의 일치하는 스위트 스팟에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책 경로를 바꿀 주요 시나리오로 최근 보고서만큼 좋지 않더라고 울퉁불퉁한 물가 하락이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라며 이 경우 이른 시점의 금리인하는 불가능하다고 봤다. 반면 인플레이션 지표가 매우 양호한 수준으로 하락을 이어갈 경우 "멀지 않은 시점의 금리인하를 예상한다"며 "몇 달간 지표를 더 지켜보겠다"고 전했다.
연준의 베이지북에서도 미국의 경기 과열은 식고 있는 한편, 물가 진전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관찰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준은 베이지북에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제활동이 소폭의 성장을 보였다"면서 가계 지출은 거의 변화없이 물가도 대체로 완만한 상승을 유지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연준은 "다가오는 선거와 국내 정책, 지정학적인 갈등과 인플레이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향후 6개월간 성장세가 둔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