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을 비롯한 러시아 작가의 책들이 유럽 도서관 서가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건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봄부터다. 라트비아 국립도서관에서 3권이, 에스토니아 타르투대학에선 푸시킨과 니콜라이 고골(1809∼1852) 등 러시아 작가의 책 8권이 도난당했다.
도난 사건은 서유럽에서도 발생했다. 스위스 제네바대학 도서관, 프랑스 파리의 국립도서관(BnF)과 리옹의 디드로도서관, 독일 베를린·바이에른 주립도서관도 러시아 작가의 책들을 도난당했다. 작년 가을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도서관에서는 79권이 종적을 감췄다.
상당수는 푸시킨 생전 초판본 등 희귀 판본이었다. 30일(현지시간) 독일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SZ)에 따르면 유럽 경찰기구 유로폴은 지금까지 유럽에서 최소 170권이 도난당했고 금전적 가치는 250만유로(약 37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유로폴은 지난 24일 조지아 국적 절도 용의자 4명을 체포했다. 앞서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프랑스에서도 5명이 붙잡혔다. 경찰은 이들에게서 150권 넘는 고서를 압수했다. 그러나 왜 유럽 전역에서 하필 전쟁 발발과 함께 러시아 작가들 책이 사라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파리 대학언어문명도서관(BULAC)의 러시아 서가 책임자 아글레 아체초바(48)는 절도범이 노릴 만한 고서 목록을 만들어놓고 도둑을 기다렸다. 작년 10월9일 남성 2명이 위조 신분증을 제시하며 도서관에 등록한 뒤 목록과 일치하는 책을 요청했고 다음날 밤 도서관에 침입했다.
아체초바는 인근에 있는 국립도서관에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민주주의를 연구한다는 용의자가 위조 서류를 들고 수 개월간 40차례 드나들었다고 SZ에 전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자국 작가들을 선전에 활용하는 점을 근거로 문학 애호가의 과도한 애국심 또는 러시아 당국의 개입을 배경으로 추측한다.
러시아군은 전쟁 초반 우크라이나 헤르손을 점령한 뒤 푸시킨의 대형 초상화를 거리에 내걸었다. 이보다 앞서 러시아의 침공 직후 우크라이나는 곳곳에 세워져 있던 푸시킨 동상을 철거했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작년 9월 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푸시킨의 서사시 '폴타바'를 인용했다. 이 작품에서 1709년 폴타바 전투 당시 스웨덴과 연합해 러시아와 싸운 우크라이나 지도자가 반역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푸시킨은 '폴타바' 이전 반체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도난당한 책 일부는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경매로 나왔다. 바르샤바대학의 역사학자 히에로님 그랄라는 그중 한 권이 3만500유로(약 4천500만원)에 낙찰됐다며 "전체적인 작전이 러시아 중앙에서 조직된 게 확실해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아체초바는 "전쟁과 제재가 유럽 시장을 바꿨다. 수집가들이 그런(러시아 작가의) 책을 구하기 어려워졌다"며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들 같다"고 추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