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죽음을"...페루서 최초로 안락사

입력 2024-04-23 17:40


안락사·조력자살이 불법인 페루에서 온몸이 마비된 40대 여성이 예외를 인정받아 안락사를 선택했다. 카톨릭 신자가 많은 페루에서 안락사가 시행된 것은 처음이다.

22일(현지시간) 심리학자이자 다발성근염 환자인 아나 에스트라다가 47세에 안락사로 세상을 떠났다고 AP·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에스트라다의 변호사인 호세피나 미로 퀘사다는 엑스(X·옛 트위터)에서 에스트라다가 지난 21일 사망했다면서 "아나는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존엄한 죽음을 위한) 싸움에 함께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정을 지지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남겼다"고 밝혔다.

퀘사다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한 아나의 투쟁은 수천명의 페루인들에게 그 권리의 중요성을 일깨웠다"고 덧붙였다.

가톨릭 신자가 많은 중남미 지역의 다른 대부분 국가와 마찬가지로 페루도 안락사와 조력자살을 금지하고 있다.

중남미 국가 중 콜롬비아와 쿠바가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고 에콰도르에서는 지난 2월 특정 조건 아래 행해진 안락사는 범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헌재의 결정이 있었다. 전 세계적에서 캐나다, 벨기에, 스위스 등 소수 국가만 안락사를 허용한다.

에스트라다는 2022년 법원으로부터 의료지원을 통해 사망할 권리를 얻어내 페루에서 안락사한 최초의 인물이 됐다.

그는 근육 염증으로 근력이 저하되는 퇴행성 질환인 다발성근염 환자다. 12세 때부터 증상이 나타나 20세 무렵엔 스스로 걷지 못하고 휠체어에 의지했다.

에스트라다는 장애에 굴하지 않고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해 심리치료사로 일했다. 집을 사고 부모에게서 독립했으며, 연애도 하고 고양이도 길렀다.

그러나 2015년부터 그의 상태가 악화하기 시작해 2년 뒤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됐고, 키우던 고양이는 입양 보내야 했으며, 전신이 거의 마비된 채 튜브를 통해 음식을 섭취하면서 누워서 생활했다.

이에 에스트라다는 2019년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소송을 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언제 삶을 끝낼지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싶다고 호소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병은 더 악화해 호흡마저 어려워져 때때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야 했다. 2021년 초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하루 24시간 내 몸 안에 갇힌 죄수 같다"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에스트라다는 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침대에 누워 재판 과정에 참여했고 '존엄한 죽음을 위한 아나'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소송 과정 등을 공유하는 등 '존엄한 죽음'을 향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2022년 페루 대법원은 에스트라다의 결정을 보건당국이 존중해야 한다는 하급심을 확정했다.

현행법대로라면 안락사를 도운 이는 최고 3년형에 처해지지만 에스트라다는 이 판결로 예외를 인정받아 그의 안락사를 지원한 의료진도 처벌받지 않게 됐다.

에스트라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뒤 언론에 죽음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며 "나는 삶에서 고통을 더 견디지 못하게 될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화롭고 차분하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때 안락사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