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이하 인플레)이 불거진 지 2년이 넘었지만 전 세계인들은 올해도 최대 경제현안으로 꼽을 만큼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오히려 국민이 실제 생황에서 느끼는 체감물가는 올라가는 추세다. 올해 11월에 치러질 제4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인플레 문제가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운명을 가를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1월까지 안정세를 찾던 소비자물가상승률(CPI)이 2월 들어서는 3%대로 재상승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체감물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농산물 가격은 2월 전체 물가 상승분의 80% 이상을 기여할 만큼 급등하고 있는 점이다. 특히 신선과일 가격은 2월에 42% 이상 급등해 32년 5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신선과일 중에서는 단연 사과값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 작년 생산량이 30% 이상 급감한 사과값은 지난 1월에는 57%나 오른 데 이어 2월에는 70% 이상으로 급등하는 추세다. 최근에는 대체재인 귤, 배 등으로 옮겨가는 사과값 상승 도미노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사과값 급등발 인플레라는 의미의 ‘애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다.
애플레이션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론적 배경이 필요하다. 인플레는 원인별로 비용 상승과 수요 견인으로 나뉘고, 상승속도에 따라 마일드·캘로핑·하이퍼로, 경기와 관련해 디플레이션·스테그플레이션·슬로플레이션·골디락스, 정책 의지와 결부돼 리플레이션·디스인플레, 그리고 공유 경제와 관련해 데모크라플레이션 등이 있다. 애플레이션은 데모크라플레이션의 일종으로 공공성을 띠고 있어 한번 발생하면 그 파장이 의외로 크다.
애플 플레이션이 심각한 것은 앞으로 세계 경제가 기후변화와 같은 디스토피아(dy stopia) 시대가 본격적으로 닥친다는 점이다. 매년 초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이 2015년부터 단골 메뉴로 다루고 있는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utopia)의 반대되는 개념인 반(反)이상향으로, 예측할 수 없는 지구상의 가장 어두운 상황을 말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WEF는 앞으로 10년 동안 세계 경제와 국제금융시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위험 요인으로 경제·환경·지정학·사회·기술 등 5개 분야에 걸쳐 총 28개의 디스토피아 우선 과제를 발생 가능성과 파급력 등의 기준으로 각각의 순위를 매겨 발표했다. 발생 가능성과 발생하면 파급력이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기후변화를 꼽고 있다.
애플레이션이 일반 국민에게 얼마나 경제적인 고통을 주는가를 간단하게 총공급 곡선(AS?노동시장과 생산함수에 의해 도출)과 총수요 곡선(AD·투자와 저축을 의미하는 ‘IS 곡선’, 유동성 선호와 화폐 공급을 의미하는 ‘LM 곡선’에 의해 도출) 이론을 통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애플레이션이 잡혀서 총공급 곡선이 우측(AS1→AS2)으로 이동되면 성장률이 높아지고 물가가 낮아지는 ‘골디락스’ 국면이 도래한다. 반대로 애플레이션이 발생해 총공급 곡선이 좌측(AS2→AgS1)으로 이동하면 성장률이 떨어지는 대신 물가가 올라가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이 발생한다. 애플레이션 발생 여부에 따라 경제 고통이 극과 극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앞으로 디스토피아 시대가 전개되고 국토면적이 협소한 우리의 경우 총공급 곡선이 좌측으로 이동해 스테그플레이션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 애플레이션이 지속되면 우리 국민들의 장바구니 물가 상승세가 지속되고 실질소득이 떨어져 국민들이 감내해야 할 경제적 고통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애플레이션이 지속되면 국민의 실생활과 관련해 또다른 인플레이션인 ‘스크루플레이션’(screwflation)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스크루플레이션이란 미국 헤지펀드 업체인 시브리즈파티너스의 더글라스 카스 대표가 처음 언급한 것으로 ‘쥐어짠다’는 의미의 '스크루(screw)'와 물가가 올라가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이미 우리 국민들 사이에는 “손에 들어오는 소득이 줄어 쥐어짜더라도 체감물가가 올라 살기가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스크루플레이션을 호소하는 부쩍 늘고 있다. 사과를 비롯한 농산물 가격이 좀처럼 잡히지 않음에 따라 우리 국민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 하소연을 정책당국은 주목해야 한다.
각국 중앙은행도 사과값과 같은 장바구니 물가를 ‘짖지 않은 개(The Dog That Didn’t Bark)’라 인식해 지표물가만 중시해오던 종전의 입장을 바꿔 체감물가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우선순위를 두기 시작했다. 미국 중앙은행(Fed)도 지표물가가 안정세를 보이는 속에서도 체감물가가 불안하자 금리인하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다.
그 대신 소비자물가(CPI)보다 가격소비지출(PCE)를 더 중시해야 한다는 주문으로 대응하고 있다. PCE는 특정품목 가격변동에 따른 소비자의 반응, 즉 대체효과를 감안하지 못하는 CPI의 한계를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CPI 상승률은 3.1%이지만 PCE 상승률은 2.4%로 PCE로 본다면 체감물가도 잡혀가고 있다는 것이 Fed의 시각이다.
지표와 체감물가 간 괴리가 가장 심한 우리 입장에서는 애플래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인하를 늦추자는 요구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MZ세대와 소상공인의 고금리 부담이 한계수준에 와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 방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햇사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농수산부장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한국에서 거론되고 있는 두 방안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 공급망 분야의 석학인 미국 메세추세츠 공대(MIT)의 요시 셰피 교수는 이상 기후로 사과공급에 차질을 빚으면 유통, 소매를 거치는 과정에서 수급 불균형이 더 심화되는 ‘채찍 효과(bullwhip effect)’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채찍 효과가 수급 불균형 심화의 주범이라면 사과값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역(逆)채찍 효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정부 비축분 방출과 같은 특단의 대책을 가져가는 것이 최선책이다. 최근처럼 심리요인과 네트워킹 효과가 크게 나타날 때는 정책당국이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애플레이션을 부추기는 투기행위 등을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경제 각료는 경제지표에 얽메이기보다 국민 편에서 더 중요한 ‘프레이밍 효과’를 감안해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어야 한다. 지표 프레임에 갖혀 “시간만 지나면 되겠지’하면 ‘삶은 개구리 신드룸’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 정책당국은 이 점을 염두에 둬 사과값 안정과 같은 민생문제에 최우선순위를 둬 경제정책을 추진해야 할 때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