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보잉(티커명:BA) 항공기가 처음 추락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 그때, 이 사태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이듬해에 같은 기종이 이륙 6분 만에 추락해 잘못 설계된 조종시스템(조종특성향상시스템, MCAS)이 원인으로 지목됐고, 2년 가까이 모든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기도 했죠.
팬데믹까지 덮쳐 주가가 75% 급락하던 보잉이 이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되돌린 줄 알았던 올해, 멀쩡해야 할 동체 문짝이 날아가고, 앞바퀴가 사라지고, 제조 공정에서 수시로 불량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항공우주 산업, 상업용 여객기와 무기 수출로 전세계를 주무르던 이 회사, 100년 넘게 시장을 대표하던 이 기업에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알래스카 항공의 사고기인 1282편은 불과 이륙 10분 만에 사고를 겪었습니다. 좌석을 늘리기 위해 불필요한 비상구를 막아둔 도어플러그가 1만 6천피트 상공에서 폭발음과 함께 사라진 겁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주말에 만석이어야 할 그 자리가 하필 비어있어서 누군가가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추락사고와 다름없는 충격이 이어지고 있죠.
사라진 도어플러그를 찾아 한 달 가까이 조사를 진행한 미 연방항공청은 사고 원인으로 제작 과정에 있어야 할 볼트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36만 7천개의 부속 가운데 문짝이 동체에서 떨어져나가는 걸 막아줄 단 하나의 볼트, 그런데 정말 이 볼트만 조이면 모든 문제가 끝나는 걸까요?
도어플러그는 본래 2006년 이전까지 보잉 기종 설계에 포함조차 되지 않던 부속입니다. 저가 항공사들이 박리다매식으로 더 많은 승객을 태우고 싶어하는 수요가 늘면서 좌석을 설치하고 마치 귀마개하듯 도어플러그라는 부품으로 문을 막아둔 겁니다. 라이언에어 등 저가 항공사 납품에 맞추려던 보잉은 새로운 737시리즈 대신 미 연방항공청 인증이 쉬운 737-900ER 기종의 도어플러그를 덮는 방식으로 설계를 변경했습니다.
보잉이 이렇게 다급했던건 경쟁자 에어버스의 가파른 성장, 그리고 부메랑처럼 돌아온 매출 압박 때문입니다. 보잉은 이미 16년 전인 2008년부터 경쟁사 에어버스에게 수주 경쟁에서 크게 밀렸고, 2011년엔 자국 항공사인 아메리칸 에어라인에 A320네오 수주마저 뺏기자 돌이킬 수 없는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737을 대체할 새로운 기종 개발 대신 속도전에서 에어버스 수주를 견제할 기종, 737맥스개발이 시작됩니다. 보잉은 연비를 높이려 너무 큰 엔진을 달고, 심지어 균형조차 맞지 않아 너무 위쪽에 설치하는 바람에 이륙할 때의 각도를 잘못 맞추면 실속해 추락할 위험이 있는 상태인 여객기를 내다 팔았습니다.
2016년 정체상태이던 매출은 사고 이후 적자로 돌아섰고, 팬데믹까지 겹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보잉에게 안겨주고 있습니다. 많은 보잉 출신 엔지니어들도 고질적인 내부 병폐를 성토해왔고, 당시 최고경영자가 물러난 뒤 사고 수습을 하던 데이브 캘훈 최고경영자도 품질 문제로 사과하며 눈물을 흘리는 지경까지 와있습니다.
방위산업체 EADS를 산하에 두고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 항공사가 연합한 에어버스 그룹은 1969년 로저 베테유의 주도로 A300시리즈라는 항공기로 여객 사업을 시작한 곳입니다.
2014년엔 유지보수 비용이 20%나 낮은 CFM의 리프 양발 제트엔진과 탄소섬유소재 날개 끝에 작은 지느러미를 붙여 연비를 15%나 끌어올린 혁신적 A320네오로 시장을 흔들게 됩니다. 대한항공을 비롯한 항공사 수주가 늘고 보잉이 쥐고 있던 737 중단거리 여객기 시장이 이후 차례로 잠식 당하면서 2018년 이후 에어버스가 벌써 5년째 전체 수주량에서 보잉을 완전히 넘어서 있죠.
에어버스는 지난해 1년간 주문 취소를 제외한 2,094대의 여객기를 수주했고, 수주 잔량은 8,598기에 달합니다. 매달 50대씩 생산한다면 14년치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물량이 쌓여있는 겁니다.
현재 보잉은 신형 737맥스 항공기의 매달 생산량 38대에 불과합니다. 수주 잔고 세부 항목에서도 소형 단일통로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현재 주력인 와이드바디, 중장거리 여객기도 신규 수주에서 에어버스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문량과 수주잔고를 고려할 때, 에어버스에서 737MAX와 같은 대규모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보잉이 다시 1위로 복귀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는 분석까지 나왔습니다.
5년간 시련을 겪고 있는 보잉이지만, 원래 이런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보잉은 1916년 시애틀에 설립해 세계대전 당시 정상급 폭격기를 개발한 기술력의 기업이었고, 아파치 헬기와 공중급유기, 대잠초계기 등 미 전략 항공기를 생산하는 한 축이기도 합니다.
제트 여객기 시대를 열어준 707여객기를 시작으로 세계 최초의 4개의 엔진과 2층 객실을 갖춘 747점보기 등으로 기술력으로 시장을 독점하다시피한 기업이기도 하죠. 2018년까지 연간 매출 1,011억 달러, 주당 400달러를 바라보던 기업이지만 지금은 연 매출 780억 달러에 순손실 22억원을 끌어안고 주가마저 더디게 반등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저점대비 50% 가량 올랐던 주가는 올해 사고 여파로 12% 도로 하락하고 있고, 월가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 등은 동일비중 부정적 전망을 내고 있는 곳입니다.
보잉의 오랜 고객인 유나이티드항공은 차기작인 737맥스10 도입 연기를 결정했고, 항공업계 오랜 영향력을 행사해온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의 팀 클라크 경은 "마지막 기회"라며 경고를 보내기도 했죠. 보잉이 경영을 우선하던 맥도넬 더글라스와 합병한 뒤 기술보다 재무성과에 집착한다는 건데, 팀 클라크 경은 "항공기를 어떻게 생산하는지 그 뿌리와 가지부터 살펴보아야 하고, 그것이 바로 좋은 경영의 출발점"이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투자 대비 수익률과 현금흐름, 주주보상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이 경쟁사 에어버스는 동급 최대이자 가장 효율좋은 A321네오 인도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보잉처럼 한때 큰 위기를 겪은 GE를 가까스로 정상화시킨 로렌스 컬프 회장은 주력인 항공 엔진 사업에 대해 "제품 관점에서 보면 오랜 기간에 걸쳐 구축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 비즈니스"라고 말합니다.
같은 관점에서 지금 문짝이 떨어져나간 채, 납품사 하청업체에 감시를 늘리려는 보잉이 언제까지 지금 기종을 버틸 수 있을까요? 정말 볼트만 다 조이면 이 간극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