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 후 사라진 경영자, 러시아 첩보원이었다

입력 2023-12-16 07:27


유럽 최대 전자결제 업체로 꼽혔던 독일 와이어카드의 회계 부정 사건에 연루된 경영인이 러시아 정보당국 첩보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5일(현지시간) 와이어카드의 사내 보유금 19억 유로(약 2조7천억 원)가 사라진 사건으로 수배된 얀 마르살레크(43) 전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러시아의 첩보원이었다고 보도했다.

1980년생 오스트리아 국적자인 마르살레크는 최소 수억 달러에 달하는 외부 투자자들의 자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지난 2020년 6월 와이어카드의 회계 부정 사건 직후 자가용 비행기로 벨라루스로 탈출한 뒤 모스크바로 이동, 러시아 국적과 함께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마르살레크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독학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 19세 때인 1999년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했다. 이듬해 마르살레크는 와이어카드에 합류했는데, 당시 이 회사는 주로 인터넷 포르노와 도박 사이트를 대상으로 했던 신생 송금 업체였다.

이후 와어어카드는 독일 증권시장에 상장될 만큼 급속도로 성장하며 미국의 전자결제업체 페이팔의 경쟁자로 꼽힐 정도였다. 와이어카드를 통해 이뤄진 각종 송금 액수가 한 때 1년에 1천400억 달러(약 182조 원)를 넘어섰을 정도다.

각국 정보당국과 경찰의 수사 결과 마르살레크는 와이어카드 경영자로 일하면서도 비밀리에 러시아 정보당국을 위해 움직인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군 정보기관 총정찰국(GRU)과 대외정보국(SVR)이 중동과 아프리카 등 각국에서 암약하는 러시아 요원과 협력자들에게 자금을 보내는 것을 도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의 용병 기업 바그너그룹의 자금 이체 과정에서도 마르살레크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르살레크는 독일 정보기관이 와이어카드를 통해 송금한 내역 등 각종 정보를 러시아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검찰은 마르살레크가 러시아 정보기관이 영국에서 운영하는 5개의 첩보원 조직을 관리하는 등 10년 가까이 러시아 정보당국을 위해 일한 것으로 확인했다.

독일 뮌헨에서 월세 3만5천 유로(약 5천만 원)의 고급 주택에서 거주했던 마르살레크는 종종 동료들에게 자신과 국제 스파이 조직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동료들은 이를 모두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그러나 2020년 6월 그의 이중생활도 끝이 났다. 언론에서 와이어카드의 회계 부정 의혹이 제기됐고, 회계법인의 특별감사에서 실제로 사내 보유금 19억 유로가 사라진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후 마르살레크가 벨라루스로 탈출한 뒤 와이어카드는 파산했고, 당시 최고경영자(CEO)였던 마르쿠스 브라운이 분식회계 혐의로 체포됐다. 브라운 전 CEO는 현재 재판을 받고 있지만, 사라진 19억 유로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