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25학년도 대입부터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대폭 확대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공계의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된 여파에 의대 증원까지 겹칠 경우 우수 인재들이 이공계 대신 의대에 더욱 몰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이공계 교수들은 뜻이 있는 인재들이 의대 대신 이공계를 선택할 수 있도록 보상 체계를 강화하는 등 '이공계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17일 정부 관계자 등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2006년부터 3천58명으로 묶인 전국 의대 입학정원을 2025년부터 대폭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증원 규모가 1천명 이상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의대 정원이 크게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면서 이공계는 '유탄'을 맞을 것으로 우려한다.
가뜩이나 의대 쏠림으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의대 증원 방침을 발표할 경우 이공계에 미치는 파장이 적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서울 주요대 화학과 A 명예교수는 "의대 증원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은 분명하지만, 이공계 인력 양성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며 "(의대 정원 증원이) 실제로 이뤄지면 이공계에는 완전히 폭탄"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초반 이공계 기피가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가, 취업 어려움 때문에 '인문계보다 이공계가 상대적으로 낫다'는 인식으로 이공계가 어렵사리 살아남았는데, 이번에 또 이런 일이 불거지니 정말 난감하다"고 했다.
또 다른 주요대 물리학과 B 교수는 "정원이 늘어난다면 학생들이 의대로 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라며 "미래 사회에 가장 기여할 수 있는 분야가 이공계열인데, 의대 정원 정책만 있고 이공계를 위한 균형적인 정책이 없는 게 아쉽다"고 질타했다.
다른 대학 기계공학 C 교수는 "지금도 의대에 가기 위해 재수, 삼수까지 하는 상황인데, 의대 증원이 되면 당연히 이공계에 불똥이 튈 것"이라며 "몇 년간 공대 입학 성적이 내려갈 것은 틀림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정부가 내년도 R&D 예산을 삭감한 데 이어, 이공계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의대 정원 확대까지 추진하자 현 정부에 '서운함'을 내비치는 목소리도 들린다.
A 명예교수는 "정부가 최근에 R&D 예산을 깎으면서 '카르텔'에 대한 아무 근거도 밝히지 못했다"며 "과학자들을 도둑놈 취급해 젊은 연구자들의 충격이 상당하다"고 꼬집었다.
이공계 교수들은 우수 인재들이 의대에 진학하지 않고 이공계에서 보람 있게 연구할 수 있도록 보상체계를 재설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B 교수는 "돈이 되지 않더라도 학문적으로 뜻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연구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정부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대에 가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70∼80살까지 일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므로, 이공계 분야에서도 '정년 연장' 등 직업의 안정성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A 명예교수는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고 의대에 가는 것은 대학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사회 전반의 유인 구조 때문"이라며 이공계 분야 진출을 유도할 수 있는 보상체계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공계 일부에서는 이 같은 우려가 과하다는 분위기도 읽힌다. 의대 정원 확대가 일부 영향이 있겠지만, 이공계 근간을 뒤흔들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C 교수는 "의대 정원이 증가하면 결국 의사 평균 소득이 하락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10년 후쯤에는 (의대 쏠림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른 이공계 대학의 D 교수는 "혹시 이공계 인재가 유출되더라도 그 숫자는 몇백 수준이라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며 "이공계 처우를 개선해 우수 인재를 유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강조했다.
교육부는 의대 쏠림을 막을 부작용도 고민하겠다는 입장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의대 정원 규모가 결정되면) 의대 쏠림 부작용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도 검토해 발표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