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 곤란해야 강제추행" 40년만에 바뀐다

입력 2023-09-21 15:36


'저항이 곤란한 정도'여야 강제추행죄로 판단하던 기준을 대법원이 완화하면서 처벌 범위가 넓어지게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1일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1천만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강제추행죄에서 추행의 수단이 되는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해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일 것을 요구하는 종래의 판례 법리를 폐기한다"며 "상대방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하거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해 상대방을 추행한 경우에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이 성립 요건인데, 기존 대법원 판례는 폭행이나 협박을 인정하는 판단 기준을 '상대방에게 저항하는 것이 곤란한 정도'로 설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강제추행 여부를 피해자의 저항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강제추행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분류하던 옛 관념의 잔재라고 봤다. 1983년부터 이어온 이런 기준이 시대 흐름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항거 곤란을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피해자에게 정조를 수호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며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으로 하는 현행법 해석으로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일반 형법에서 폭행·협박죄가 인정되는 수준의 행위만 있다면 강제추행죄에서도 폭행 또는 협박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게 맞는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형법 260조의 폭행은 '사람의 신체에 대한 유형력의 행사'가 있으면 인정되고, 형법 283조의 협박은 '상대방에게 현실적으로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 고지'가 있으면 성립한다. 이 기준을 강제추행죄에도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해당 사건의 피고인 A씨는 2014년 8월 주거지에서 여성인 사촌 동생을 끌어안아 침대에 쓰러뜨리고 신체 부위를 만져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인 보통군사법원에서는 강제추행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3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항소심인 고등군사법원 재판부는 "피고인의 물리적인 힘의 행사 정도가 저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였다고 볼 수 없어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강제추행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아동청소년성보호법상 위계등추행 혐의만 적용해 벌금 1천만원을 선고했다.

이에 군검사가 상고했고 대법원은 2018년부터 사건을 심리한 끝에 상고를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행위는 피해자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해 피해자를 강제추행한 것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며 다시 재판하라고 판결했다. 다만 개정 군사법원법에 따라 사건을 군사법원이 아닌 서울고등법원으로 보냈다.

대법원 관계자는 "종래 판례 법리를 40여년 만에 변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을 법 문언 그대로 해석하자는 취지이지 법 해석만으로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자는 취지는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일반적으로 '비동의추행죄'는 상대방의 명시적 동의를 받지 않고 신체 접촉 등을 통해 성적 불쾌감을 야기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강제추행죄는 A씨 사건과 같이 폭행이나 협박을 수단으로 추행하는 '폭행·협박 선행형'과 폭행 자체가 곧바로 추행에 해당하는 '기습추행형'으로 나뉜다. 이번 판결은 폭행·협박 선행형에 관한 법리에 한정한 것이라고 대법원은 설명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