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이 된 기분" (로리 매킬로이/PGA 프로골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거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전 세계 프로 스포츠 산업이 중동 오일 머니에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세계 프로골프 시장의 갈등을 키워온 미국프로골프 PGA 투어와 사우디 국부펀드 자금으로 조성한 LIV골프, 아랍에미리트(UAE) 기반 DP 월드투어(유러피언 투어)가 지난 7일 전격 합병한 여파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거대 단체의 머니 게임에 휘말린 프로 선수는 좌절했지만, 미국 뉴욕주식시장에서 아쿠쉬네트 등 골프 관련주가 들썩이는 등 전 세계 자금시장에도 동요를 일으켰다.
골프 뿐만이 아니다 사우디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이어 프랑스의 카림 벤제마까지 품어 프로축구 시장의 구도를 흔들고 있고, 이웃 카타르는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인수를 위해 랫클리프에 최후 통첩을 남겼다. 일련의 사태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세계 스포츠계에서 큰 역할을 맡으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 중 가장 큰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 왕실 '금고지기' 전면에…PGA도 거절 못한 오일 머니
PGA 투어는 지난해 6월 LIV 골프 출범 직후부터 이에 가담한 선수들을 '배신자'로 부르며 출전 자격을 박탈하는 등 강경 대응을 이어왔다.
제이 모너핸 커미셔너는 타이거 우즈, 로리 매킬로이 등 핵심 선수들을 붙잡아 두고 대립각을 세워왔지만 스스로 전격 합병에 동의하면서 그동안의 날선 발언들이 무색해졌다.
파이낸셜타임스 등에 따르면 제이 모너핸 PGA투어 커미셔너는 베니스·런던 등에서 야시르 알 루마이얀 PIF 총재와 만나 두 차례 식사와 골프 라운드를 가진 뒤 이번 합의를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모나한 커미셔너는 "기본 합의일 뿐 확정 합의는 아니다”라고 한 발 물러섰지만 사우디 자본에 굴복했다는 비난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PGA투어와 LIV골프, DP월드투어의 합병을 이끈 인물은 사우디 국부펀드 PIF(공공투자기금)를 이끄는 야시르 알 루마이얀 총재다.
루마이얀 총재는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최측근으로 왕실 금고나 다름없는 약 780조 원 규모의 PIF와 세계 최대 석유회사 아람코의 최고경영자이기도 하다.
그는 2021년 10월 PIF 자금을 기반으로 LIV 골프를 설립해 필 미켈슨, 더스틴 존슨, 브룩스 켑카 등 최고 기량의 선수들을 끌어들이며 세력을 불려왔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불과 1년 사이 더스틴 존슨은 이번 합병 전까지 LIV골프 투어상금만 4,400만 달러(약 568억원), 무명이던 테일러 구치는 연속 우승 이후 2,580만 달러(330억원)을 벌어들였다.
● 메시 놓쳤지만 벤제마 잡았다…"축구 리그 매출 목표 4배"
천문학적인 오일 머니는 프로골프 뿐만 아니라 세계 프로축구시장까지 장악해 나가고 있다. 사우디 행이 거론되던 리오넬 메시가 미국으로 향하면서 쓴소리를 남겼지만, 발롱도르를 수상한 카림 벤제마를 우리 돈 5,500억원에 붙잡았다.
사우디는 지난해 12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연봉 2억 유로에 알 나스르로 이적시킨데 이어 2년간 4억 유로를 들여 프랑스 축구스타 카림 벤제마를 자국 우승팀 이티하드에 안착시켰다.
역시 국부펀드가 주도하는 자금을 바탕으로 한 사우디 축구 구단들은 다음 영입 대상으로 첼시의 은골로 캉테, 바르셀로나 세르히오 부스케츠, 조르디 알바 등을 후보로 물색하는 것으로 외신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중동 국가들의 프로축구 시장 투자는 맨시티, 뉴캐슬 등으로 익히 알려져있다. 아랍에미리트는 시티풋볼클럽이란 회사를 통해 전세계 13개 '시티' 구단을 보유하고 있고, PIF는 컨소시엄을 통해 2021년 뉴캐슬 구단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카타르가 맨체스터유나이티드까지 쥐게 되면 영국 프로축구 리그 상위팀이 산유국 손바닥에 놓이게 된다.
사우디 PIF는 내친 김에 알 이티하드, 알 알리, 알 나스르, 알 힐랄 등 자국 프로 리그 4개 팀의 지분 75%를 확보해 자국 축구산업 규모를 키우겠다는 구상까지 공개했다. 현재 유럽 3부 리그 수준인 사우디 프로축구 수준을 높여 2030년까지 리그의 연간 매출을 4억 8,000만 달러, 약 4배 늘리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 스포츠 관광에 사활…PIF 주도 '석유없는 사우디'
이처럼 사우디가 국부펀드를 통해 스포츠에 파격적인 자금을 쏟아 붓는 배경에는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제시한 비전2030이 있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가 한국 부산과 경쟁하는 세계박람회 개최 목표시점, 그리스, 이집트과 경쟁 중인 차기 월드컵 개최 시점 등이 모두 2030년이다.
현재 메카 성지 순례를 포함해 연간 1,600만 명인 관광객을 2030년 1억 명으로 늘려 국내 총생산의 10%까지 확보하겠다는 사우디 비전2030의 완성 시점이기도 하다.
사우디는 이를 겨냥한 '네옴시티'. '옥사곤(수상동시)', 트로제나(산악 관광단지), '홍해 대교 프로젝트' 등 대규모 인프라 사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문화의 사우디에 대한 인식을 바꿔 '석유 없는 시대'이자 탄소 배출 감축을 병행할 기반 산업 중 하나로 스포츠 관광을 축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포뮬러1 경기를 위해 200억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검토하는가 하면, 앤디 워홀 전시회와 한국 K팝 스타를 초청한 콘서트로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분야 투자도 확대하는 중이다.
사우디가 전천후 투자를 이어가는 배경에는 그간 감정 싸움을 벌이던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끌어안기 외교에 나섰다는 진단도 나온다.
사우디 원유 거래에 중국 위안화 결제가 사용될 조짐을 보이는데다 이란과의 관계 개선 과정에 미국이 배제되어온 점이 반영되었다는 분석이다.
실제 미국 정부는 이달 6일 '미국과 사우디 80년 파트너십'이라는 자료를 통해 두 나라간 관계가 여전히 공고함을 재확인했다.
미국 정부는 해당 자료에서 사우디는 미국 군사 무기 최대 교역국이자 안보 협정을 체결한 나라로 에너지, 의료, 엔터테인먼트 등 경제 협력을 확대하는 한편 비전 2030에 따라 자국 기업이 큰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언론인 까슈끄지 사망 이후 빈 살만 왕세자와 묘한 감정 싸움을 벌여온 바이든 행정부가 적극적인 화해 제스처를 보여준 셈이다. 스포츠 분야 일련의 대규모 거래를 주도해온 사우디 오일머니의 행보가 탄력을 받을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