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라고 하면 보통은 산업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목디스크나 허리디스크, 진폐증이나 근골격계 질환과 같이 신체적인 피해를 입는 사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신체적 손상 뿐만 아니라 일터에서 우울증, 불안장애, 적응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에 걸리는 경우도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요.
2019년 7월,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도입되면서 산재보상법에서도 '상사나 동료로부터의 직장 내 괴롭힘, 고객의 폭언 등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발생한 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하게 됐습니다.
또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적응장애나 우울증, 업무 중 사고를 목격한 후 겪는 불안장애,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에 의해 발생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겪었을 때에도 산재 신청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정신질환이 업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 따른 요양급여와 휴업급여가 지급됩니다.
즉, 산재 신청을 통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을 경우 적절한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4년…정신질병 산재 끊이지 않는다
중앙노동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1∼3월 노동위원회에서 처리된 개인분쟁 사건 중 '직장 내 괴롭힘'에 따른 해고, 정직, 전직, 감봉 등 부당해고 사건이 16%나 늘었습니다.
중노위는 새로운 노동 관행을 요구하는 MZ세대를 중심으로 괴롭힘 관련 부당해고 등 구제신청 사건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놨는데요.
이러한 분위기는 산업재해 사례에서도 충분히 감지되는데요.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정신질병으로 산재 신청을 한 근로자는 2018년 268명, 2019년 331명, 2020년 581명, 2021년 720명, 지난해 678명으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2019년 7월 16일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도입된지 4년이 지났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도입 당시와 비교해 산재 신청 건수는 2배 이상 늘어난 셈이죠.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코로나 펜데믹 이후 재택근무가 끝나고 직장에 복귀하면서 적응의 어려움과 직장 내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특히 MZ세대 등 근속연수가 적은 근로자일수록 이러한 경향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산재 신청이 늘어남에 따라 승인 건수도 2018년 201건에서 지난해 445건으로 2.2배 증가했는데요.
지난해 기준 산재 승인 질병으로는 적응장애(227명, 33.5%)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우울증(80명, 12%),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63명, 9.2%), 급성스트레스장애(26명, 3.8%), 불안장애(23명, 3.4%) 등의 순이었습니다.
● 정신질병 산재, 업무 인과관계 입증 어려워…승인율 65%에 불과
#2018년 4월 천안에 있는 A사에 입사해 근무하던 B씨. B씨는 2016년 6월, 권고사직 강요, 부당한 보직 변경과 전보 등으로 지속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병원으로부터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공단은 적응장애 질병은 업무적 요인보다는 기존에 우울증 치료 병력이 있고 다른 직장동료들과의 원만하지 않은 관계 등 개인의 취약성에 기인해 발병했거나 악화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즉, "업무와의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19년 12월 B씨에 대해 '요양불승인처분'을 했고 B씨는 여기에 불복해 심사청구를 했지만 2020년 3월 서울행정법원은 기각 결정을 내렸습니다.
B씨는 설계팀 소속으로, 외부업체로부터 발주 받은 장비도면확인, CAD프로그램을 이용한 장비설계 업무 등을 담당했는데 회사 근무시간동안 근무태도가 불량했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설계 불량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혀 정직 2주의 징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앞서 대전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도 B씨가 부서전보, 정직 등으로 일부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업무량이나 업무부담 정도가 동료들보다 높아 보이지 않고 인격적인 무시와 조롱, 조직적인 따돌림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 정신질환을 유발할 정도의 과하거나 비정상적인 내용이 확인되지 않아 인과관계 인정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겁니다.
이처럼 아직까지 신체적 손해가 아닌 정신절환으로 인한 산재를 인정 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앞서 사례에서처럼 일단 정신질병의 경우, 업무로부터 발생했다는 사실을 근로자가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고 등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분명해 입증하기가 원활하지만, 다른 우울증과 불안장애 등의 경우 근로자의 성격, 사생활 근무환경 중 어떤 것이 주 원인인지 콕 집어내기가 모호합니다.
특히 사실상 상사의 폭언, 갑질 등으로 정신과 진단을 받은 피해자가 회사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받는 것부터가 쉽지 않고, 노동청을 통해서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받을 수도 있지만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사내 괴롭힘의 경우 성희롱, 욕설 등 순간적으로 가해지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들이 확실한 증거를 수집하기도 쉽지 않죠.
이 때문에 지난해 기준으로 정신질환 산재 신청에 대한 승인율은 65.6%에 그치고 있는 상황인데요.
정신질환에 대한 객관적 증명이 쉽지 않아 아예 산재 신청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한국인의 행복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가깝다고 합니다.
주중 활동의 절반 가까이를 직장에서 보내는 근로자들이 만족할 만한 조직 문화가 조성된다면 개인의 불행 뿐만 아니라 사회적 손실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정부가 특별근로감독 등을 통해 안전한 근무 환경이 보장될 수 있도록 충분한 뒷받침에 나서야 할 테고,
회사도 적극적인 예방교육과 적극적인 피해 대응으로, 노조 등 근로자들도 위계적·경쟁적 조직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더 이상 늦추지 않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