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시대 개막…BOJ 통화정책, 어떻게 변하나? [국제경제읽기 한상춘]

입력 2023-04-17 07:44


1882년 일본은행(BOJ) 설립 이후 최장수 총재였던 구로다 하루히코가 퇴임하고 우에다 가즈오가 취임했다. 최대 관심사는 지난 10년 동안 국제금융시장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아베노믹스, 즉 엔저를 통한 수출 진흥과 경기 부양 정책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베노믹스의 뿌리는 19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동산 거품 붕괴와 함께 불어닥친 스테그플레이션으로 ‘팍스 재펜시아’까지 꿈꾸었던 일본 정책당국 입장에서는 크게 당황했다. 정책대응도 ‘대장성 패러다임’과 ‘미에노 패러다임’을 놓고 엇갈렸다. 전자는 ‘엔저와 수출 진흥’으로 상징되나, 후자는 ‘물가 안정’으로 대변된다.

일본 경제는 내수부문의 활력을 되찾아 디플레이션 국면에서 탈피하기 어려운 고질병을 갖고 있다. 내수 부진이 인구 고령화 진전, 높은 민간저축률 등과 같은 구조적인 요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재정여건도 크게 악화돼 1990년대처럼 정부가 민간수요를 적극적으로 대체해 촉진하는 데도 임계점을 넘은 지 오래됐다.

내수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디플레이션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경제여건 이상으로 강세를 보이는 엔화 가치가 약세로 돌아서야 가능하다. 집권당인 자민당이 1990년 이후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것은 BOJ 총재였던 미에노 야스오가 고집스럽게 물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비타협적 통화정책이라고 본 것도 이 때문이다.



2012년 12월 아베 신조가 자민당 총리로 재집권하자마자 엔저를 통해 성장을 지향하는 구로다 하루히코 당시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를 전격적으로 영입했다. ‘경기 상황과 통화 가치가 따로 노는 악순환 국면을 차단하는 것이 일본 경기를 살리는 최후 방안’이라는 미국 예일대 하마다 고이치 명예 교수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베노믹스’를 추진했다.

정책수단별로 아메노믹스는 세 단계로 구별된다. 2013년 구로다 총재가 취임하자 대규모 국채매입을 통해 유동성을 바주카포식으로 공급하는 ‘충격요법’을 동원했다. 그 후 3년이 지나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금리를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이마저도 효과가 미흡하자 수익률 곡선을 통제(YCC)해 10년물 금리가 제로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았다.

각국 중앙은행 통화정책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울트라 금융완화정책으로 엔저를 유도하는 데는 성공했다. 구로다 취임 당시 85엔에서 움직이던 엔·달러 환율이 퇴임 때에는 132엔선까지 올라섰기 때문이다. 중국 위안화, 한국 원화 등 일본의 주요 경쟁국 통화에 대해서는 엔화 가치는 크게 떨어졌다.

중요한 것은 아베노믹스의 궁극적인 목표인 ‘수출이 얼마나 진작됐을까’ 하는 점이다. 특정국이 자국통화 평가절하로 수출이 늘기 위해서는 마샬-러너 조건, 즉 외화표시 수출수요의 가격탄력성과 자국통화표시 수입수요의 가격탄력성을 합한 것이 ‘1’을 넘어야 한다. 일본의 수출입 구조는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수출 진작 효과가 크게 않았다.

모든 정책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엔저 정책이 의도했던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음에 따라 부작용이 심하게 노출됐다. 대외적으로 경쟁국 간에 갈등만 조장시켜 왔다. 엔저 유도를 통한 수출 진작은 인접국과 경쟁국에게 고스란히 피해를 주는 대표적인 ‘근린궁핍화 정책’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일본 내부에서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타격을 받는 곳은 장기간 엔저 정책으로 채산성이 지속적으로 악화돼 왔던 내수업체다. 저물가가 체질화됐던 일본 국민도 수입물가 급등으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경제 고통은 의외로 높았다. 가장 반겨야 할 수출업체도 아베노믹스 추진 직전까지 한때 80%를 웃돌았던 달러결제 비중을 40% 내외로 낮춰 놔 엔저가 되더라도 채산성 개선 효과가 크지 않았다.



아베노믹스를 10년 이상 추진했지만 일본 경제는 심상치 않다. 작년 하반기 이후 역성장한 데 이어 소비자물가상승률도 올해 들어서는 4%대로 한 단계 더 상승했다. 경기가 침체되는 속에 물가가 오르는 전형적인 스테그플레이션 현상이다. 장기간 엔저 정책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여실히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다.

특히 1인당 소득이 한국에게 추월당할 확률이 높아지면서 ‘역경술국치’라는 신조어가 나돌 정도로 일본 내에서는 온통 난리다. 역경술국치란 일본에게 한국의 주권을 넘겨준 경술국치에 빗대 1인당 소득이 한국에게 추월당하는 현상을 말한다. 현재 환율 수준과 올해 예상 성장률로 1인당 소득을 산출하면 한국이 일본을 앞서는 것으로 나온다.

1990년 이후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30년’이란 장기간 침체국면을 겪으면서 정책당국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응도 계수는 ‘2’로 무력화(8∼10은 ‘초민감’, 4∼7은 ‘민감’, 3 이하 ‘무력화’) 단계다. 일본 정부가 어떤 정책을 내놓더라도 일본 국민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정책적인 면에서 일본 경제의 몰락 원인을 따져보면 통화정책은 마이너스 금리제로 ‘유동성 함정’에 빠진 지 오래됐다. 유동성 함정이란 케인즈언의 통화정책 경로(통화정책 변경→금리 변화→총수요 영향→경기 조절)상 금리를 변경하더라도 총수요가 반응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유동성 함정에서는 금리를 올릴 때보다 내릴 때 더 심하게 부작용이 나타난다.

재정정책은 국가채무비율이 270%에 달해 진퇴양난에 놓여 있다. 적자국채를 발행이 재정지출을 늘리면 ‘구축효과(crowding out effect)’가 발생해 경기부양 효과가 거의 없다. 반면 국가채무를 줄이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이자 부담이 급증해 디폴트 위험이 높아진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인상에 맞춰 BOJ가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책당국과 경제정책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민간이 담당해야 한다. 하지만 총수요 항목별 성장 기여도에서 70%를 차지하는 소비는 ‘저축의 역설’에 걸려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인구절벽이 현실로 닥친 이후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일본 국민이 저축을 늘리는 성향이 더 강해졌다. 작년 3분기 이후 역성장한 것도 이 요인이 크다.

투자는 ‘토빈 q’ 비율이 ‘1’ 이하로 떨어지면서 신규투자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자본이 빠르게 잠식(노후화)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 미국 예일대 교수가 주장한 이 비율은 시장가치를 자본의 대체비용으로 나눈 값으로 ‘1’ 이하로 떨어지면 기업은 자본이 감소하더라도 신규투자를 꺼리게 된다.

이밖에 일본은 정치, 행정규제, 국가채무, 젠더, 글로벌 등 5대 분야에서 ‘선진국 함정(HIT)’에 빠져있다. 선진국 함정이란 아르헨티나, 필리핀처럼 선진국 진입 문턱에서 후진국으로 재추락하는 ‘중진국 함정(MIT)’에 빗대 일본처럼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던 국가가 후진국으로 추락하는 현상을 말한다.

일본 경제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제3의 대안이 모색돼야 한다. 균형재정승수가 ‘1’인 점을 착안해 ‘간지언’ 정책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빌 클린턴 정부 시절 국가채무를 줄이고 경기를 살린 ‘페이 고’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도 강하다.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부의 저축세(negative saving tax)’ 도입하고 ‘이민청’을 신설하자는 제안까지 나오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부작용이 심하게 발생한 만큼 우에다 총재는 비정상적인 아베노믹스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출구전략이 비상대책의 역순으로 추진되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일본의 통화정책은 인플레 안정에 보다 무게를 두면서 YCC 포기, 기준금리 인상, 대차대조표(B/S) 축소 순으로 추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미에노 패러다임으로 복귀될 경우 장기간 엔저에 따라 내수시장이 붕괴된 여건에 엔화 가치가 강세가 되면 수출마저 부진해 일본 경제가 깊은 나락으로 추락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전임 구로다와 달리 우에다 총재는 취임 초부터 충격요법보다는 점진적으로 통화정책을 수정해 나가는 ‘계단식 방식’일 취할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