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당국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를 간첩 혐의로 체포한 것은 최근 서방에서 러시아 스파이가 잇달아 붙잡혔기 때문에 미국을 상대할 협상 수단으로 삼기 위함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 NBC 방송은 31일(현지시간) 러시아 당국이 기자를 체포한 배경을 분석하는 기사에서 이번 사건이 최근 러시아 스파이들이 서방에서 줄줄이 붙잡히면서 러시아 정보당국이 궁지에 몰린 상황과 관련됐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부터 유럽에서는 러시아 스파이들의 정체가 탄로 나 당국에 붙잡히는 일이 잇따랐다.
지난 16일 폴란드 정부는 철도와 공항에서 파괴 공작을 준비해온 혐의를 받는 러시아 간첩단을 일망타진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러시아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는 주요 환승 지점인 폴란드 제슈프 인근 공항 등에 비밀 카메라를 설치하고 감시 활동을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 지난해 6월 네덜란드 정보기관은 가짜 신분을 이용해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잠입하려 한 러시아 스파이를 붙잡았는데, 이 스파이가 이전까지 13년 동안이나 가짜 신분으로 살면서 미국에서 정계 동향을 수집해 왔다는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러시아군 정보기관 총정찰국(GRU) 소속인 이 스파이는 ICC에 취업을 시도하기 전 미국에서 브라질 출신 유학생으로 위장하고 2018년 미국 최고 명문 사립대 중 하나인 존스 홉킨스대 대학원에 진학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NBC는 미 정보당국 고위관계자를 인용해 유럽 당국이 근래 이례적으로 많은 러시아 스파이를 체포하는 데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중앙정보국(CIA)이 도움을 줬다고 전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러시아 정보당국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직 CIA 고위 관리 출신인 존 사이퍼는 "러시아 정보기관은 압박을 느끼는 상황이고,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서방이 러시아를 약화하려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메시지를 강화하거나, 해외에서 체포된 러시아인들의 석방을 포함해 서방의 양보를 얻어낼 협상 카드를 찾으려 시도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사이퍼는 "이런 결정을 주도하는 것은 종종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 역학 관계"라며 "외국 기자를 체포하고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처에 적들이 있다는 서사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지난 30일 WSJ 모스크바 지국 소속의 미국 국적 에반 게르시코비치(32) 특파원을 간첩 혐의로 구금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미국인 기자를 간첩 혐의로 체포한 것은 냉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당시 크렘린궁 측은 이번 사건이 미국과의 죄수 교환 계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런 정보는 없다"고 답했다.
앞서 미국은 작년 12월 러시아와 죄수 교환 협상을 통해 여자 프로농구 스타 브리트니 그라이너를 석방한 바 있다.
(사진=연합뉴스)